세실(世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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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덕이 있는 왕의 신주를 옮기지 않고 대대로 모시는 종묘(宗廟)의 실(室).

개설

세실(世室)은 종묘에서 친진(親盡)과 무관하게 대대로 그 실에 신주를 봉안한다는 의미이다. 세실은 묘제(廟制)와 소목(昭穆)의 계산에 포함되지 않는다.

조선시대에는 본래 왕조를 개창한 태조의 신주가 조천(祧遷)하지 않고 영원히 제사를 흠향(歆饗)하는 불천지위(不遷之位)였다. 그 밖의 신주는 제후의 종묘가 5묘제로 운영됨에 따라 2소(昭) 2목(穆)의 4대(代)가 지나면 조천하여 능에 매안(埋安)하거나 별묘로 옮겨야 했는데, 세실이 되면 신주를 조천하지 않고 종묘 정전에서 계속 제사를 받들었다.

조선전기에는 4대(代)가 지나 신주를 별묘인 영녕전(永寧殿)으로 조천할 때, 그 왕의 업적을 평가하여 세실로 삼을지 여부를 결정하였다. 그러나 조선후기인 1683년(숙종 9)에는 처음으로 친진에 이르지 않았음에도 미리 세실로 결정하는 일이 일어났고, 18세기 이후에는 전왕(前王)을 세실로 정하거나 당대의 정치적 역학 관계에 따라 세실을 정하는 일이 빈번하였다.

내용 및 특징

조선전기 연산군 때, 정종과 태종이 친진하자 처음으로 정종의 신위를 영녕전으로 옮기고 태종의 신위는 세실로 삼아 그대로 정전에 모셨다. 만약 친진한 신주를 조천하지 않으면 ‘제후는 5묘제를 따른다.’는 원칙에 어긋나게 되므로, ‘세실’ 개념을 별도로 도입하여 묘제와 관련 없이 영원히 옮기지 않도록 한 것이다. 1457년(세조 3)에 예조(禮曹)에서, “공훈은 조(祖)라 하고, 덕망은 종(宗)이라 하여 칠묘(七廟)·오묘(五廟) 이외에 또 백세불천위(百世不遷位)가 있으니, 주나라 문왕의 세실과 노나라 세실옥(世室屋)이 이것입니다.”라고 하여, 고대 중국의 제도를 근거로 세실 개념을 종묘 운영에 차용할 것을 건의하였다(『세조실록』 3년 3월 21일). 이것은 결과적으로 조선후기에 종묘의 운영이 변칙적으로 이루어지는 단초를 제공한 셈이었다.

변천

1471년(성종 2)에 예종의 신주를 종묘에 모시면서 환조(桓祖)의 신주를 영녕전으로 조천하였다. 이로써 태조의 조상인 목조·익조·도조·환조의 신주가 모두 영녕전으로 옮겨가게 되었다. 이들은 왕으로 추존되었을 뿐 실제로는 왕이 된 적이 없었기 때문에 이 과정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조선시대 최초의 세실 논란은 연산군 때 일어났다. 성종의 신주를 모시면서, 태조 이후 실제 왕위에 올랐던 왕의 신주를 조천해야 할 상황에 놓였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당시 왕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던 공정대왕(恭定大王) 즉 정종의 신주만 영녕전으로 옮기고, 태종의 신주는 세실이 되어 종묘 정전에 남게 되었다.

세종의 경우, 문종대부터 이미 불천지주로 거론되고 있었다. 세종의 능인 영릉(英陵)에 비석을 세우는 일에 대하여 문종은, “세종께서는 대통을 입계(立繼)하여 우리 조정의 법제를 환연하게 모두 갖추어 후세에 끼쳤으니, 백세(百世)의 불천지주이시다. 역시 비석을 세워 덕업을 기록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였다(『세조실록』 2년 1월 25일).

세종과 세조는 친진이 되기 전에 이미 세실로 삼아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었다. 1495년(연산군 1)에 세종·세조·성종을 미리 세실로 정하자는 상소가 있었는데, 이에 대하여 예조에서는 “성종의 덕은 저절로 후세의 공론이 있을 것이므로 아직 거행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여 세실 여부를 미리 결정하는 것은 옳지 않으며 친진한 뒤의 평가를 기다려야 한다고 고하였다(『연산군일기』 1년 12월 30일).

조선전기 세실의 결정은 비록 세간에서는 세실을 당연시하는 분위기가 조성되어 있었던 경우가 없지 않지만, 대체로 왕이 승하한 뒤 새로 즉위한 왕과 신하들이 전왕의 신주를 종묘에 모시는 부묘(祔廟)를 앞두고 친진에 이른 왕의 업적을 평가하면서 이루어졌다. 즉 친진 4대가 지난 뒤 평가를 하여 계속 제사를 지낼 것인지를 결정하였다. 다만, 정통에서 벗어났다고 여겨지는 왕들의 신주는 영녕전으로 조천하고, 나머지는 거의 세실로 정하는 추세가 이미 조선전기에 확립되면서 종묘의 변칙적인 운영이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조선후기에도 숙종 초까지는 전왕의 부묘로 인하여 친진이 발생하면 세실 논의를 거쳐 결론을 내렸고, 연산군 때의 성종 세실 논의처럼 미리 세실을 정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인식이 있었다. 그런데 1683년(숙종 9) 송시열(宋時烈)은 효종이 비록 친진에 이르지 않았으나 명나라에 대한 의리를 지킨 공덕이 두터우므로 부조지위(不祧之位), 즉 세실로 미리 정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숙종실록』 9년 2월 21일). 이 효종 세실 논의는 큰 반대 없이 실행되었고, 이어 인조도 세실로 정하여 곧 종묘에 고하는 예를 행하였다(『숙종실록』 9년 3월 4일).

이후 영조가 숙종을, 정조가 영조를 세실로 정하였으며, 이런 경향은 19세기에 더욱 강화되어 순조 초에는 송환기(宋煥箕)의 건의에 따라 종묘에 부묘되기도 전에 정조를 세실로 삼기로 결정하였다. 순조 이후의 왕들은 왕위 계승 상황과 외척 가문의 입지에 따라 자신의 정통성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세실을 지정하였으므로, ‘후대의 평가’라는 세실의 본래 의미는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참고문헌

  • 이현진, 「19세기 조선 왕실의 왕위 계승과 종묘 세실론」, 『한국사상사학』32, 2009.
  • 이현진, 「연산군대 廟制論의 논의과정과 그 의미」, 『역사와 경계』60, 2006.
  • 이현진, 「영·정조대 종묘 世室論과 왕실의 위상 강화」, 『조선시대사학보』38, 2006.
  • 한형주, 「조선초기 종묘의 오묘제와 제향의식의 성립」, 『명지사론』11·12합집,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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