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계(回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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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이 하문(下問)한 내용에 대하여 신하들이 의논하여 다시 상주(上奏)하는 일.

개설

회계(回啓)는 왕께 주달하거나 보고한 일에 대하여 왕이 대신 혹은 관서에 의견을 물으면 의논을 거쳐 다시 보고하는 것을 말한다. 왕에게 보고하는 것을 일반적으로 계(啓)라 하므로, 왕의 하문을 받고 재차 계를 올린다는 뜻에서 회계라 하였다. 회달(回達)이라고도 한다.

내용 및 특징

신하가 정무에 관하여 왕에게 보고하는 것을 계 또는 계문(啓聞)이라 하며, 상주한 문서는 계문(啓文)이라 한다. 양사(兩司)의 합동 계사를 ‘합계(合啓)’라 하고, 암행어사 등이 올리는 것을 ‘서계(書啓)’, 사헌부·사간원의 계사를 ‘대계(臺啓)’라 하는 등 올리는 관부에 따라 여러 명칭으로 칭했다.

그러나 『경국대전』이나 『전율통보(典律通補)』 등의 문서식에는 계나 계문이 없고 경사계본식(京司啓本式)과 계목식(啓目式)이 있다. 중요한 일을 올릴 때에는 계본을 썼고, 작은 일을 올릴 때에는 계목을 사용하였다. 또 외방에서는 계목을 쓸 수 없다는 규정이 있었다. 동궁에 올리는 경우 이를 신본(申本)이라 했으며, 동궁에 보고하는 것은 신문(申聞)이라 하였다.

하지만 상주하는 관직자의 소속 관서와 성명 등을 달리 하였을 뿐 위의 서계·대계·합계 등의 문서식이 따로 있었던 것은 아니다. 게다가 국초부터 사간원 등은 수시로 계문하여 간쟁할 기회를 얻고자 하였으나, 오히려 왕이 국가의 대체(大體)에 관계된 것만을 계문하도록 전지하는 등 간략함을 추구하였다(『태조실록』 1년 11월 9일). 특히 어느 법전에도 ‘회계’와 관련한 문서식이 수록되어 있지 않은 점으로 미루어 회계의 경우도 일반 계본식 또는 계목식에 준하여 문서를 작성한 것으로 추측된다.

계문의 서식은 『경국대전』, 『전율통보』, 『백헌총요(百憲摠要)』, 『추관지(秋官志)』 등에 조금씩 다르게 실려있으나 기본 서식은 『경국대전』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첫 줄에 계목을 올리는 관서명을 적고[某衙門], 다음 줄 첫머리에는 계목으로 시작하여 ‘무슨 일로 하여[啓目云云何如]’를 적고, 다음 줄에 계목을 올린 시기와 관원을 적고[年 印 月 日 某職臣某 某職臣某], 올린 관서의 도장을 찍었다. 담당 승지가 올리면 왕이 윤허를 내리면서 이를 나타내는 ‘계’ 자가 새겨진 도장을 찍은 다음, 윤허한 날짜와 담당 승지의 성(姓)을 적고 수결하였다. 그러면 담당 승지는 계목을 올린 관서에 왕이 윤허하였다는 사실을 하달하였다.

이후 고종대까지 계문과 회계의 내용이 『조선왕조실록』에 소개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계본·계목의 문서식과 이를 원용한 회계의 작성 방식은 조선말기까지 그대로 활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사대부가에서는 ‘예조회계(禮曺回啓)’ 등 선조들이 회계했던 문서를 전사(轉寫)하거나 심지어는 회계뿐 아니라 비답의 내용까지 하나의 문서로 전사하여 보존한 사례가 있다. 이는 계문·회계 등에 대해 국정에 관한 중요한 행위이며, 주요 대국왕문서(對國王文書)로서의 의미를 부여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변천

계본은 태종대에 장신(狀申)을 개칭한 것으로, 1417년(태종 17)에는 입초(入抄)와 일반 사무 외에는 계본을 사용하도록 하였다. 1489년(성종 20)에는 일반 백성이 함부로 계본을 올리는 폐단을 시정하여 반드시 관원이 검토한 뒤 왕에게 상달하도록 하였다. 1835년(헌종 1)에는 계본의 지폭(紙幅)을 규격화하였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전율통보(典律通補)』
  • 최승희, 『한국 고문서 연구』, 지식산업사,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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