협무(俠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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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정재를 공연할 때 왕모(王母)·선모·중무(中舞)·원무(元舞)의 주변에서 춤을 춘 무용수.

개설

『조선왕조실록』에는 ‘협무(俠舞)’라고 표기되어 있으나, 일반적으로는 ‘협무(挾舞)’라고 쓰는 경우가 많다. 협무는 중심이 아닌 주변 공간에서 보조적인 역할을 한다. 따라서 무대 중앙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하는 왕모나 중무는 물론이고, 때로는 다수로 구성된 원무의 상대로서 공연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협무는 기녀가 내연(內宴)에서, 무동(舞童)이 외연(外宴)에서 공연할 때 모두 출연하였다. 협무는 춤을 출 뿐 아니라 창사(唱詞)를 부르기도 했는데, 그 구성 인원은 정재(呈才)에 따라, 또 같은 정재라 하더라도 연향에 따라 달랐다.

내용 및 특징

협무는 왕모·선모·중무·원무와 상대적인 개념이다. 모든 정재에 협무가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중심 공간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무용수가 있어야, 주변 공간에서 주변적인 역할을 하는 협무가 존재했다. 협무는 대체로 좌우로 나뉘어 했으므로 좌우협(左右挾)이라고도 불렀다. 예컨대 조선 세종 때 제정된 성택(聖澤) 정재의 경우, 기녀 1명이 왕모가 되어 가운데에 위치하고, 그 좌우에 각각 4명의 협무가 북향하여 자리하였다(『세종실록』 10년 5월 26일).

변천

『고려사(高麗史)』에 따르면, 협무는 고려시대부터 당악정재(唐樂呈才)에 등장하였다. 헌선도(獻仙桃)에는 2명의 협무가, 오양선(五羊仙)에는 좌협 2명과 우협 2명이 출연하였다. 그러나 향악정재(鄕樂呈才)에는 출연하지 않았다.

조선시대 전기의 협무 구성은 『악학궤범(樂學軌範)』을 통해 파악할 수 있다. 당악정재인 근천정(覲天庭)에 2명, 수명명(受明命)에 8명, 하황은(荷皇恩)에 6명, 성택(聖澤)에 8명의 협무가 출연하였다. 또한 헌선도와 오양선의 경우, 고려시대의 협무 구성이 그대로 전승되었다.

조선시대 전기까지는 협무가 향악정재에 등장한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조선시대 후기에는 향악정재에 협무가 출연하였는데, 다만 이때는 왕모의 상대가 아니라 원무의 상대로서 공연에 참여하였다. 예컨대 무고(舞鼓) 정재는 연향에 따라 공연하는 인원이 달랐는데, 1902년(광무 6) 11월의 진연에서는 원무 4명과 협무 4명이 연행하였다. 이때 원무가 무대 중앙에 위치한 북 가까이에서 춤을 춘 데 비해, 협무는 원무의 바깥이며 북에서 좀 더 멀어진 공간에서 춤을 추었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악학궤범(樂學軌範)』
  • 『순조기축진찬의궤(純祖己丑進饌儀軌)』
  • 『고종임인진연의궤(高宗壬寅進宴儀軌)』
  • 국립국악원, 『신역 악학궤범』, 국립국악원, 2000.
  • 평양국립출판사, 『악학궤범』,1956.
  • 조경아, 「조선후기 의궤를 통해 본 정재 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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