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부(判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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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지를 통해 올라온 계문(啓文)에 대하여 왕의 처결을 적는 행위, 또는 적힌 처결의 내용.

개설

판부(判付)는 일반적으로 신하가 청한 사안에 대하여 왕이 처결하는 것을 말한다. 좁은 의미로는 해당 관서가 보고한 형옥(刑獄) 사건에 대한 왕의 재가(裁可)를 의미하기도 한다. 태종대부터 순종대까지 거의 조선시대 전 기간 동안 사용된 용어로서, 판부의 발급과 수취를 통해 왕을 정점으로 한 중앙집권적 관료제하의 조선의 국정 혹은 행정 절차를 엿볼 수 있다.

내용 및 특징

판부는 『숙종실록』의 원주(原註)에 명시하고 있듯이 ‘공사(公事)에 대하여 왕의 뜻을 글로 써서 내려주는 것’을 말한다(『숙종실록』 45년 4월 30일). 상교(上敎)를 글로 써서 내준다고는 되어있으나 별도의 문서가 있는 것은 아니다. 승지를 통해 계문이 올라오면 왕이 윤허를 내리면서 이를 나타내는 ‘계(啓)’ 자가 새겨진 도장을 찍는다. 그리고 윤허한 날짜와 담당 승지의 성(姓)을 적고 수결(手決)하였으며, 담당 승지는 계목을 올린 관서에 왕이 윤허하였다는 사실을 하달하였다. 한편 승지가 친히 일을 아뢸 때에는 계(啓) 자를 찍지 않고 단지 승지의 이름만 쓰고 판부를 내려주었다. 상교가 단순히 허가 여부에 그치지 않고 내용을 써넣어야 할 때에는 비답(批答)을 내려주는데, 이 역시 별개의 문서로 할 수도 있고 계목의 여백에 써넣을 수도 있다. 어떤 경우에도 ‘판부’라는 문서가 별도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판부를 내려주었다는 의미에서 이를 ‘판하(判下)’라고도 하였고, ‘계’ 자를 써서 주었기 때문에 ‘계하(啓下)’라고도 하였다. 이 중에서도 특히 ‘판부’와 ‘판하’가 많이 쓰였으며, 동일한 용어로 서로 혼용되었다.

한편 계문 전반에 대한 판하가 아니라 형옥 사건에 대한 왕의 재가만을 특정(特定)하여 판부라 칭하는 경우도 있다. 사형에 해당하는 형사 사건에 대해 감형 등을 재가하는 경우 감형판부(減刑判付) 등으로 지칭한 것이 일례가 된다.

판부라는 용어는 조선시대 전 기간 동안 의미의 변화 없이 쓰였는데, 계목 등과 짝을 이뤄 왕과 관서 또는 왕과 관료들 사이에 주고받은 문서로 기능하였다. 즉 계본이나 계목 등이 신하가 왕에게 올리는 건의문에 해당된다면, 판부·비답 등은 왕이 백성이나 신하·관서에 대해 지시·허가를 내리는 문서라 할 수 있다. 이를 통해 조선시대 왕과 신하 간의 문서 수발 체제 및 의사소통 방식을 알 수 있다.

변천

판부 또는 판하라는 용어에서 ‘판(判)’은 ‘조(詔)’·‘고(誥)’ 등과 함께 천자(天子)와 관련된 용어이다. 따라서 조선초기에는 고려조의 제도를 계승하여 왕에게서 나오는 것을 ‘판’이라 쓰고 있으나, 사대를 표방한 조선이 쓰기에는 적합하지 않다는 비판이 있었다. 이에 태종대에 예문에 합당하도록 왕이 윤허한 것을 받든다는 뜻의 ‘신판의신(申判依申)’을 ‘봉교의윤(奉敎依允)’으로, 왕이 가(可)하다고 재결한 것을 받든다는 뜻의 ‘신판가(申判可)’를 ‘봉교가(奉敎可)’로, 왕이 명령을 내린다는 뜻의 ‘신판부(申判付)’를 ‘봉교하(奉敎下)’로 쓰자는 건의가 있었다. 그리고 태종이 이 건의를 윤허한 것으로 되어있다(『태종실록』 11년 9월 26일). 물론 그 후 왕의 명령을 ‘교(敎)’라 하고, 이를 받든다는 의미로 ‘봉교(奉敎)’ 등을 쓰는 것은 일반화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판부·판하는 순종대까지 『조선왕조실록』에서 변함없이 사용된 용례를 확인할 수 있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전율통보(典律通補)』
  • 『대전회통(大典會通)』
  • 명경일, 「無啓目單子의 서식과 용례」, 『고문서연구』 37, 2010.
  • 양종모, 「조선시대 형사 재판에 나타난 법문화: 왕의 사죄(死罪)에 대한 감형 판부(減刑判付)를 중심으로」, 『민족문화논총』 36,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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