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부(致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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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조선시대 왕이 종척(宗戚)·대신(大臣)의 상례(喪禮)에 부의(賻儀)를 보내던 일.

내용

치부는 고려시대에도 있었으나 항식을 제정한 것은 조선태종 때의 일이었다. 1405년(태종 5) 정·종2품관의 상에 치부하기로 정하고, 다음 해인 1406년에 정2품은 쌀·콩을 합하여 50석, 종2품은 40석으로 액수를 정하였다. 1품에게는 예장(禮葬)을 하여 주었는데, 예장하는 이에게는 따로 치부를 하지 않았다. 종친의 경우 1431년(세종 13) 동성단문친(同姓袒免親)까지 치부하는 규칙을 정했고, 1433년(세종 15) 왕의 이성유복지친(異姓有服之親)에게도 모두 부의를 보내고 조문(弔問)하며 치제(致祭)하도록 하였다. 3품 이하의 군민(軍民)이라도 공무로 인하여 국외에서 죽거나 전사(戰死)한 경우 치부하였다.

1528년(중종 23) 이후에는 『경국대전(經國大典)』의 치부 규정과 별개로 왕의 특은으로 내리는 별치부(別致賻)가 등장하였다. 별치부는 승지(承旨)대간(臺諫) 역임자에게 주는 것으로 정착되어 갔으나, 조선후기에는 원치부(元致賻)에 더하여 별치부를 하는 사례도 있어, 별치부가 왕의 은혜로 이해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용례

卒判敦寧金逌根家 東園副器一部輸送 元致賻外別致賻 令該曹優數輸送 成服日 遣承旨致祭(『헌종실록』6년 12월 17일)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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