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전(院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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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을 유지하기 위하여 정부가 지급한 전지.

개설

원(院)은 공무로 출장 중인 관리나 상인 등에게 숙식의 편의를 제공하는 시설이었다. 고려말기부터 본격적으로 발달하기 시작하여 전국적으로 확대되었다. 고려말·조선초의 정치·사회적 변동이 격심하였던 시기에 조선왕조를 건국하는 데 주도한 세력들은 사회 안정책의 일환으로 원의 설치에 관심을 기울였다. 그리하여 1391년(공양왕 3) 10월에 도평의사사에서 원을 대·중·소의 3등급으로 나누어 각각 2결·1결 50복·1결씩의 원전(院田)을 지급하도록 하는 규정을 마련하였다(『세종실록』 27년 7월 13일).

내용 및 특징

원전은 규정대로 지급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조선건국 이후 역로(驛路)의 등급이 빈번하게 바뀌었는데도 원의 등급은 그에 따라 제때 개정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1445년(세종 27) 7월의 전제개혁에서 원전 지급 규정을 개정할 때 원의 등급도 개정하였다. 이때 개편된 원의 등급은 『경국대전』에 거의 그대로 수록되어 이후 기본 규정으로 자리 잡았다.

한편, 이때 개정된 원전 지급 규정에 대로원(大路院)은 1결 50복, 중로원(中路院)은 1결, 소로원(小路院)은 50복으로 정하되, 모두 원 근처의 전지(田地)를 지급하도록 하였다. 수취와 운반의 편리성을 고려한 것이었다. 지급된 양은 1391년(공양왕 3) 당시보다 모두 50복씩 축소된 것이었다. 공법(貢法)의 시행으로 달라진 양전(量田)의 척도와 전품(田品)의 등급에 맞추어 원전의 지급 결수가 축소된 것이었다.

그런데 이 규정은 『경국대전』을 반포하는 과정에서 다시 바뀌었다. 대로는 1결 35복, 중로는 90복, 소로는 45복으로 각각 축소되었으며, 원전은 직접 경작하여 그 수확물을 가지되, 국가에 전세(田稅)를 납부하지 않는[自耕無稅] 공전(公田)으로 규정하였다. 그리고 각 원에는 원주(院主)와 원호(院戶) 2~3호를 배정하였다. 이 조치로 원의 운영에 대한 국가의 정비가 완료되었다.

원전 지급 규정이 정비되었음에도 규정대로 제대로 절급되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성종실록』 3년 2월 28일). 거기에다가 절급된 원전도 제대로 유지하지 못하고 힘 있는 사람들에게 빼앗기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성종실록』 18년 1월 14일). 원주들이 대부분 신분이 낮은 양인이거나 승려들이었기 때문이다.

국가는 역로를 ‘국가의 대맥(大脈)’으로 인식하여 역(驛)과 역전(驛田)의 경영과 관리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그럼에도 원의 경영에는 상대적으로 소홀하였다. 아마도 중앙정부의 지방 지배와 관련하여서 역은 공적(公的)인 성격이 강하였던 데 비하여 원은 상대적으로 사적(私的)인 성격을 띠고 있어서 그랬던 것으로 생각된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이장우, 「세종 27년(1445) 7월의 전제개혁 분석」, 『국사관논총』 92, 국사편찬위원회, 2000.
  • 최재경, 「朝鮮時代 院에 대하여」, 『嶺南史學』 4 , 영남대학교 사학회, 1975.
  • 최효식, 「朝鮮前期 院 經營에 관한 考察」, 『竹堂 李炫熙敎授 華甲紀念 韓國史學論叢』, 東方圖書,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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