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정(字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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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자문의 자호를 써서 순서대로 표기한 5결 단위 면적의 전지.

개설

천자문의 자호(字號)를 써서 전지(田地) 5결씩 순서대로 표기하는 방식인 자정제(字丁制)는 고려말 사전(私田)을 개혁하는 과정에서 도입되었다. 수조권자가 지급받은 과전은 1개 내지 여러 개의 자정으로 구성되었다. 1자정은 점차 5결 단위로 설정되었다. 자정은 수조지를 분급하는 단위였으며, 경기도에서는 자정을 단위로 전세미를 수송하는 요역을 부과하였다.

내용 및 특징

1388년(고려 우왕 14) 위화도회군 이후 실권을 잡은 이성계 계열의 관료들은 사전개혁 논의를 주도하였다. 이들의 주도 하에 양계를 제외한 6도에 양전(量田)을 시작하였다. 전국 토지의 정확한 조사와 파악이라는 본래의 목적 외에, 세금을 거둘 수 있는 수조지(收租地)를 다시 배분하려는 목적에서였다. 이때 결부로 파악한 토지를 수조 단위로 묶은 뒤 자정제를 적용하였다. 당시까지 전정(田丁)에 수조권자의 이름을 달았고, 그 때문에 수조권자가 수조지를 조상에게서 물려받은 조업전(祖業田)이라 우기는 일이 많았다. 새로운 자정제는, 전지 20·15·10결 등을 단위로 천자문의 글자 순서에 따라 자호를 매기는 방식이었다. 자정제의 도입은 조업전화한 사전의 혁파를 기정사실로 하는 작업이었다.

과전법은 작정제(作丁制)를 통한 토지 분급 방식으로 운용되었다. 작정제란, 수조지 분급의 편의상 20·15·10결, 혹은 10·5결씩(후에 5결로 단일화)을 1정(丁)으로 묶고 정마다 천자문 순으로 자호를 매기는 것이었다(『태조실록』 2년 8월 16일). 이를 단위로 수조지를 분급하거나, 수조권을 행사할 수 있게 하였다. 수조권자가 지급받은 자정이 곧 과전(科田)이었다. 수조권자가 절급받은 과전은 1개 내지 여러 개의 자정으로 구성되었다.

전세미 수송의 역은 요역의 한 형태였다. 『경국대전』에 의하면, 전세 납부의 시기는 그해 11월부터 다음 해 1월까지였다. 이때 각 군현에서 조창까지 전세미를 실어 나르는 노역은 관찰사의 명령에 따라 차사원(差使員)으로 임명된 각 군현의 수령이 지휘·감독하였다. 조창에서의 전세 수납과 관련된 색리(色吏)가 폐단을 일으키고 중간에 수탈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아울러 납세가 지체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지방관의 통제가 필요하였다. 전세미를 조창으로 실어 나르는 요역은, 당시 민가에서 부담하는 정례적인 요역의 하나였다.

경기도의 농민들은 특별한 방식으로 전세미 수송의 요역을 부담하였다. 경기도에서는 전세 납부자 스스로 경창(京倉)에 수납하도록 규정되어 있었다. 자정은 본래 세금을 걷는[收租] 단위였다. 각 자정마다 자정 내에서 납부해야 할 전조(田租)를 총괄하여 수조권자에게 거두어들이는 책임자로는 양호(養戶)가 설정되어 있었다. 이들은 논밭의 주인[田主]이 지정한 곳까지 전세미를 수송하는 요역을 맡아서 수행해 왔다. 성종대 이후에는 이 지역에서 전지 5결의 1자정마다 1통(統)을 만들어서, 전세미를 공동으로 납부하는 통납제(統納制)가 시행되었다. 1자정으로 구성된 1통으로 하여금 전세미를 공동 납부하게 한 통납제는, 뒤에 법제화되어 1492년(성종 23)의 『대전속록』에 반영되었다.

경기도에서 통납제를 시행할 수 있었던 것은 이 지역이 특별히 과전법 하에서 문무 관료에서 나누어 주던 수조지 분급 대상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이에 성종 초기 과전법의 마지막 개혁 조치였던 관수관급제(官收官給制)가 시행되는 것에 발맞추어 전세 수납의 요역 체계를 정비한 것이었다.

경기도를 제외한 다른 도의 전세도 5결의 1자정을 단위로 거두어들이는 조치가 1474년(성종 5) 한때 실시된 바 있다. 그러나 5결마다 책임자를 정해서 전세 수송 임무를 공동으로 수행하게 규정했던 통납제는 경기도를 제외한 다른 지방에서는 제대로 시행되지 못하였다. 수조지 분급을 위한 전정(田丁) 단위의 편제가 일상적으로 적용되던 경기 지방과 달리, 외방 군현에서는 자정제 자체가 정상적으로 운용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이후 경기도의 통납제는 조선후기 전세미 공동 납부를 위한 제도인 팔결작부제(八結作夫制)로 이어졌다.

변천

고려말 사전개혁의 과정에서 자정제가 도입되었다. 이는 전정에 수조권자의 이름을 붙이지 않고, 천자문의 글자 순서로 자호를 붙이는 방식이었다. 처음에는 전지 20·15·10결 등을 단위로 자호를 매겼으나, 성종대 이후 5결 단위의 자정제가 경기도부터 시행된 것으로 보인다. 세종대에는 한때 공법(貢法)의 연분등제(年分等第)를 논의하면서 면(面) 단위뿐 아니라 자정 단위의 세부적인 등제를 병행하는 방안이 검토되기도 하였다. 조선후기에는 토지 매매 문서[文記]나 분재기(分財記)에 양안에 기재된 자정을 표기하였다. 이로써 땅의 소유를 구분하는 지목(地目)의 위치를 분명히 하는 데 활용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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