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장(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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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승려가 아니면서 승려의 역할 곧 염불·기도·의례·권선(勸善) 등을 하던 비승비속의 집단.

개설

조선시대에는 억불 정책으로 많은 승려들이 절에서 쫓겨났다. 환속한 승려들은 마을에 불당이나 염불당을 마련하여 절에서처럼 기도하고 염불하며 각종 의례를 행하는 비승비속(非僧非俗)의 존재로 남았다. 이들은 주로 집단을 이루어 마을을 돌아다니며 시주를 받고 복을 기원하는 등 서민 불교의 유행에 기여하였다. 교학과 수행에 대한 전문적 식견이 없어 염불과 노래, 춤 등으로 사람들을 끌어 모았다. 임진왜란 이후 생활이 어려워지자 수백, 수천의 무리를 이루어 도적에 가담하기도 하였고, 일부는 놀이패로 변모하여 이른바 사당패(社堂牌)가 되기도 하였다.

내용 및 특징

(1) 기원

고려시대 국가 불교가 융성하면서 많은 사람이 불교 신앙을 가졌다. 출가한 승려뿐 아니라 절과 관련된 일을 생업으로 삼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대규모의 사찰을 관리하고 유지하는 데는 많은 인력이 필요하였고, 이를 전문적으로 담당하는 계층도 증가하였다. 교학을 익히고 수행하는 승려와는 다른 하급 승려를 수원승도(隨院僧徒) 또는 재가화상(在家和尙)이라고 불렀다. 이들은 각 절에 예속되어 토지를 경작하고 가람의 중수 등을 전담하였는데 큰 절에는 1,000명이 넘는 경우도 있었다. 국난 시에는 징발되어 군사로 편입되기도 하였다. 이들이 조선시대 사장으로 이어진다.

조선은 건국과 함께 숭유억불 정책을 시행하였다. 고려시대 불교가 지녔던 권력과 경제력, 사회적 기반 등을 제거하여 신왕조의 기틀을 확립하고자 하였다. 종파와 사찰 수를 대폭 축소하고, 승려가 되는 길을 법으로 제한하였다. 그 결과 수많은 승려가 절 밖으로 쫓겨나 강제로 환속(還俗)당했다. 이들은 새로운 삶을 찾아야 했고, 결국 절이 아닌 세속에서 승려가 아니지만 승려로 살아가는 사장(社長)의 방법을 택했다.

천년을 이어 온 불교 신앙은 일시의 억불 정책으로 쉽게 중단시킬 수 없었고, 민간의 신앙은 여전히 지속되었다. 법으로 절 출입을 금지하자 백성들은 오히려 가까운 사장들을 찾아갔다. 사장은 깊은 산중이 아니라 번화한 마을에 불당 혹은 염불소(念佛所)를 차려놓고 백성들이 원하는 각종 염불과 기도, 의례 등을 행하였다. 고려말 조선초의 불교계에는 국가의 부역을 피해 입산한 사람들이 많았다. 출가수행이 목적이 아니었으므로 이들은 절에 의탁하여 각종 허드렛일을 맡았고, 때로는 염불과 각종 법회의 의례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이들 대부분이 절에서 밀려나 세속에서 집단을 이루며 사장으로 활동하였다. 조선초기에는 이들을 절의 낙성 경찬회(慶讚會)에 불러 음식을 나눠주기도 하였다(『세종실록』 30년 12월 5일).

(2) 활동

조선전기 사장들의 폐해가 자주 지적되었다. 세조 때 사장들이 원각사(圓覺寺)연화승(緣化僧)을 사칭하여 공문서와 도장을 가지고 각 고을을 돌아다녔다. 노비들에게 시주를 많이 하면 양인(良人)으로 면천해 준다는 등 사기 행각을 벌였다(『세조실록』 11년 8월 13일). 이들 사장 또는 거사(居士)들은 승려도 아니고 속인도 아닌데 생업이 없이 신역(身役)을 피해 무리지어 다니며 남녀가 섞여 거처하고 징과 북을 두드린다고 비난받았다(『예종실록』 1년 6월 29일).

사장의 폐해가 심해지자 국가에서는 이들을 검거하여 군역(軍役)에 충당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이 소문이 돌자 승려들까지 모두 피신하여 전라도 사찰이 거의 텅 빌 지경이었다. 결국 백성들의 소요가 일어날까 염려하여 중지한 일도 있었다.

이와 같이 사장의 폐단이 적지 않았지만 이들은 억불의 조선시대에서 나름대로의 순기능을 담당하였다. 마을과 가정을 지켜주던 절이 폐사되고, 또 있다 해도 출입이 금지되면서 백성들은 정신적 귀의처를 한순간에 잃었다. 그런데 절에 살던 이들이 사장을 이루어 마을 안으로 들어와 염불소를 짓고 아미타불 염불을 행하자[『성종실록」 2년 6월 8일 3번째기사] 많은 대중이 여기에 참여하였다. 이들은 염불뿐만 아니라 노래와 춤, 재담까지 곁들여 시주를 이끌어냈다. 조정에서는 민심을 현혹하는 폐단이라 걱정하였지만 백성들에게는 재미있는 구경거리이자 신앙 활동이었다. 조선 불교를 서민 불교라고 하는 배경에는 이처럼 사장의 신앙 공동체 활동도 포함된다.

변화

조선후기가 되면 사장은 불교와의 관련성이 점차 줄어든다. 이 시기에는 사장보다는 거사라는 명칭이 널리 사용되었다. 임진왜란 이후 남녀노소 할 것 없이 거사라 칭하고 북치고 노래하며 무리지어 다닌다거나(『선조실록』 35년 5월 5일), 남자는 거사, 여자는 사당(社堂)이라 하며 일을 하지 않고 걸식하는데, 천백의 무리가 거리에 줄을 잇고 산골짜기에 가득 찼다고 하였다(『선조실록』 40년 5월 4일), 국난을 겪으면서 피폐해진 현실에서 사장, 거사들은 유랑민과 다를 바 없었다. 이들 중 일부는 놀이패처럼 마을을 떠돌아다니는 사당패를 형성하였다. 대부분 불사(佛事)의 시주가 아니라 직접적으로 놀이와 유희에 대한 대가를 받기 위해 놀이꾼으로 변모하였다. 유교적 질서가 고착화되면서 더욱 쇠락해지는 불교 신앙에 생계를 기대할 수는 없었다. 그런데 이마저도 여의치 않은 거사들은 결국 도적으로 변하는 등(『정조실록』 10년 2월 22일) 18세기 말이 되면 불교 신앙 집단으로서의 특성을 대부분 상실하였다. 하지만 일부 사당은 여전히 불교와 관련된 시주 집단으로 그 명맥을 이어나갔다. 조선후기에 이르면 불사에 시주하는 사당(舍堂)이 종종 등장하기도 하는데, 이들에 의해 신앙 공동체의 성격이 계승되기도 하였다.

참고문헌

  • 전경욱, 「才僧 계통의 연희자」, 『민속학연구』11, 국립민속박물관, 2002.
  • 진나라, 「조선전기 社長의 성격과 기능-불교신앙활동을 중심으로-」, 『한국사상사학』22, 한국사상사학회,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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