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질(權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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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483년(성종14)∼1545년(명종즉위) = 63세]. 조선 중기 중종 때의 문신. 자는 사안(士安).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예조 참판권주(權柱)의 아들이며 권전(權磌)의 형이고, 이칙(李則)의 사위이다. 둘째 딸이 퇴계(退溪)이황(李滉)의 둘째 부인으로 출가하였다.

사화의 피화

1504년(연산군10) <갑자사화(甲子士禍)>가 일어나서 예조 참판으로 있던 아버지 권주가 화를 당하였다. 그때 마침 연산군을 비난하는 <언문(諺文) 투서 사건>이 발생하자, 그 배후로 죄인들의 자제들을 의심하여, 그를 잡아다가 국문(鞠問)하고 거제도(巨濟島)로 귀양보냈다.

1506년(중종1) <중종반정(中宗反正)>이 일어나자, 그는 귀양에서 풀려났다. 나라에서 <갑자사화> 때에 화를 당한 사람들을 신원하고 포상할 적에 아버지 권주는 의정부 우참찬(右參贊)으로 증직(贈職)되고, 그는 현릉(顯陵)참봉(參奉)으로 기용되었다. 이어 집경전(集慶殿) 참봉 · 순릉(順陵) 참봉 · 후릉(厚陵) 참봉으로 옮겼다.

1517년(중종12) 광흥창(廣興倉)봉사(奉事)로 승진하였는데, 1519년(중종14)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나서, 훈구파(勳舊派)가 조광조(趙光祖) 등의 사림파(士林派)를 축출하였다. 그리고 1521년(중종16) 사림파 안처겸(安處謙)이 훈구대신들을 무고(誣告)한 사건이 일어나면서 조정에 남은 사림파가 모두 쫓겨나게 되었다. 그와 아우 수찬(修撰)권전도 사림파로 몰려, 동생은 고문을 받다가 죽었고 그는 예안(禮安)으로 유배되었다.

1538년(중종33) 사면을 받고 풀려나서, 이듬해에 관작이 회복되었으나, 고향 풍산(豐山) 지곡리(枝谷里)에 돌아가서 살았다. 1547년(명종2) 지곡리 옛 집에서 죽었는데, 향년이 63세였다.

무덤과 성품

묘소는 경상도 안동 풍산 지곡리 선원에 있는데, 사위 이황이 지은 묘갈명(墓碣銘)이 남아 있다.

그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수염과 눈썹이 아름답고 이야기를 잘하였는데, 이야기가 끝이 없었지만 사람들이 싫증내지 않았다. 그러나 선을 따르고 악을 버리는 데에는 확고하게 지키는 바가 있었다. 거듭 가문의 화를 당하며 억울하게 살았으나, 훨훨 마음을 털어버리고 슬픈 기색이 없었다.

관력, 행적

참고문헌

  • 『중종실록(中宗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학봉전집(鶴峯全集)』
  • 『해동잡록(海東雜錄)』
  • 『퇴계집(退溪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