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형(五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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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시행되었던 태형·장형·도형·유형·사형의 5가지 기본적인 형벌.

개설

오형(五刑) 중 태형(笞刑)은 가벼운 죄를 지은 경우 태(笞)라는 작은 형장으로 때리는 벌이다. 10대에서 50대까지 10대 단위로 다섯 등급이 있었다. 장형(杖刑)은 태보다 큰 형장인 장(杖)으로 치는 형벌이며 60대에서 100대까지 다섯 등급이 있었다.

도형(徒刑)은 지금의 일종의 징역형과 유사한데, 『대명률』의 규정에 의하면 비교적 중한 죄를 범한 자를 관(官)에 붙잡아두고 소금을 굽게 하며 쇠를 불리게 하는 등 노역을 시키는 것을 말한다. 노역 기간에 따라 도1년(徒一年), 도1년반(徒一年半), 도2년(徒二年), 도2년반(徒二年半), 도3년(徒三年) 등 5등급으로 나누어져 있으며, 각각 장60(杖六十), 장70(杖七十), 장80(杖八十), 장90(杖九十), 장100(杖一百)의 신체형이 부과된다는 것이 특징이다.

유형(流刑)은 매우 중한 죄를 범한 자를 차마 사형시키지 못하고, 먼 지방으로 귀양 보내어 죽을 때까지 살게 하는 것을 말한다. 『대명률』 규정에 유형은 유배 보내는 거리에 따라 2,000리, 2,500리, 3,000리의 세 등급이 있었으며, 각각에 장100(杖一百)을 아울러 집행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마지막으로 사형은 목을 매달아 죽이는 교수형과 목을 베어 죽이는 참수형 두 가지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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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정 경위 및 목적

오형은 고대 중국에서부터 시행되었는데, 이 당시 오형은 모두 죄인의 신체를 심하게 상하게 하는 육형(肉刑)이었다. 즉, 도둑질한 자들을 경계하기 위하여 먹으로 죄명을 몸에 새겨 넣는 묵형(墨刑), 음식을 훔친 자에게 음식 냄새를 맡는 코를 베는 의형(劓刑), 도망간 죄인이 다시 도망가지 못하게 발뒤꿈치를 자르는 월형(刖刑), 강간이나 간통 등의 범죄를 저지른 자가 다시 그런 범죄를 저지르지 않도록 남성을 잘라내는 궁형(宮刑), 마지막으로 사형인 대벽(大辟)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다가 중국에서는 수·당 때에 이르러 육형 대신에 태형, 장형, 도형, 유형을 새로 제정하여 이른바 태·장·도·유·사의 새로운 오형 제도가 시작되었다. 이처럼 수·당의 새로운 오형(五刑)은 고대의 육형(肉刑)에 비해서는 신체에 대한 위해(危害)가 훨씬 완화된 형벌이었으며, 조선에서는 이 새로운 오형 제도를 도입하여 기본적인 형벌로써 시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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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조선에서는 중국의 오형을 도입하긴 하였으나 오형의 집행 방법에는 조금 차이가 있었다. 먼저, 태형과 장형은 모두 태와 장으로 죄인의 볼기를 치는 형벌로서, 원래 『대명률』에서는 가시나무를 사용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조선에서는 일반적으로 물푸레나무를 사용하였고 없으면 다른 나무를 대신 썼다. 그런데 ‘형장은 대부에게까지 올라가지 않는다[刑不上大夫]’는 전통적 법사상에 의거하여 사대부의 경우에는 대개 한 대당 얼마씩 오늘날의 벌금과 유사한 속전(贖錢)을 납부하고 매질을 면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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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나 장에 쓰이는 매는 길이가 약 109㎝에 매 치는 부분 지름은 태의 경우 8㎜, 장의 경우 1㎝ 정도였다. 매를 칠 때에는 매우 치라는 관장(官長)의 소리를 급창(及唱)이 받아 복창하면 집장사령(執杖使令)이 매를 치는데, 둘러선 나졸 중의 한 사람이 활처럼 생긴 산판(算板)의 나무 조각을 하나하나 옮기거나, 또는 하급 관속이 종이에 그리거나, 아니면 주위에 둘러선 관속들이 한꺼번에 합창을 하며 매 수를 세었다. 남자의 경우에는 아랫도리를 벗기고 볼기를 쳤지만, 여자의 경우에는 홑옷을 입힌 채로 형을 집행하되 종종 엉덩이에 물을 끼얹어 물볼기를 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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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형은 죄인을 일정 기관에 배속시켜 노역을 시키는 형벌이므로 지금의 유기징역과 유사하다. 조선시대 도형에 처해진 자들은 종이를 뜨기도 하고, 기와를 굽기도 하고, 염장(鹽場)에서 소금을 굽기도 했다. 또한 역에서 잡일하는 역일수(驛日守), 지방 관아에서 수위 역할을 하는 청지기[廳直], 관아 뜰에 불을 밝히는 정료간(庭燎干), 종이를 다듬이질하여 반듯하게 만드는 도침군(搗砧軍) 따위로 배속되기도 하였다. 말하자면 관아의 잡역부 노릇을 하게 한 것이다.

예컨대 무오사화 때 함경도 종성의 관아에 배속된 정여창은 중앙 관원이 찾아오면 홰를 잡고 서서 정료간 노릇을 하였고, 함경도 길주 영동역에 정배된 중봉 조헌은 중앙에서 온 고관이 지날 때마다 역졸(驛卒) 복장을 갖추고 앞에서 길을 인도하기도 하였다. 도형 중에는 말단 군졸로 복무하게 하는 충군(充軍)도 있었는데, 백의종군(白衣從軍)은 도형의 일종인 충군을 말한다.

유형은 사형 다음의 형벌로서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먼 곳으로 내쫓아버리는 추방형이다. 유형은 종신형이면서도 도형처럼 일을 시키지는 않았기 때문에 오늘날로 치면 무기금고인 셈이다. 유형은 앞서 언급한 『대명률』의 규정에 의하면 죄인의 거주지에서 유배지까지의 거리에 따라 2,000리, 2,500리, 3,000리 등 세 가지 등급으로 나누어 죄가 무거울수록 더 먼 곳으로 귀양 보내는 것이 원칙이었다. 그런데 국토가 좁은 우리나라에서 3,000리 밖으로의 유배가 불가능하였다. 따라서 조선에서 실제 유형을 집행할 때에는 죄수가 정해진 유배지로 이동할 때 빙빙 돌고 돌아 해당 리 수를 채우게 하기도 하였으며, 아예 1430년(세종 12)에는 등급별로 유배지를 정해버렸다. 예를 들어 전라도에 사는 죄인의 유배지로는 경상도, 강원도, 함경도 고을이나 해변으로 한정하였는데, 다른 도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각각 대상 유배지가 정해졌다. 세종 때의 이 규정에 따르면 ‘유 2,000리’는 거주지로부터 600리 밖 고을, ‘유 2,500리’는 750리 밖 고을, ‘유 3,000리’는 900리 밖 해변 고을이 유배지가 된다. 말이 3,000리이지 실제 유배지는 900리 밖이 되는 셈이다.

이후 1672년(현종 13)에는 최소한 1,000리 밖으로 유배 보내는 것을 원칙으로 하는 등 법에 정한 유배지 관련 규정은 후에도 여러 차례 원칙이 바뀌었다. 또한 실제 운영 면에서도 원칙과 많은 차이를 보이기도 하였는데, 유배지를 배정하는 데 정실이 개입되어 거주지 인근 고을에 형식적으로 유배 보내는 사례도 종종 있었다. 아예 서울 근교인 강화도 교동(喬桐)은 왕족들의 유배지로서 유명하였다.

한편, 유배인을 배소로 호송할 때도 신분에 따라 차이가 있었다. 먼저 유배인이 관원 신분일 경우 호송 책임은 의금부에서, 관직이 없는 평천민은 형조에서 담당했다. 그런데 같은 관원이라도 등급에 따라 호송관이 달랐는데, 정2품 이상, 즉 지금으로 치면 장관급 이상 고위 관원은 의금부 도사(都事)가 맡았다. 그리고 이외의 관원들의 경우도 당상관은 서리(書吏), 당하관은 나장(羅將)이 나누어 맡았으며, 관직과 무관한 평천민은 지나는 고을의 역졸(驛卒)이 번갈아가며 호송을 책임졌다.

어떤 직책, 어떤 신분인가에 따라 압송관이 달랐듯이 유배지로의 긴 여행길도 죄인 처지에 따라 대우가 크게 달랐다. 평천민 대부분의 유배 길은 유배지에서의 비참한 생활 못지않게 힘들 수밖에 없었다. 이들은 이른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이동하는 것은 예사였으며, 밤새 잠도 자지 않고 가는 경우도 있었다. 이에 반해 조만간 정계 복귀 가능성이 높은 관리, 제법 힘깨나 쓰던 돈 많은 양반들의 경우 유배 길의 불편함은 그리 크지 않았다. 고을 수령과 지인들로부터 극진한 대접을 받았으며, 지나는 길에 선산(先山)에 들러 성묘를 하거나 중간에 며칠씩 쉬어가는 여유를 부릴 수도 있었다. 유배지에서의 생활 또한 천차만별이었다.

마지막으로 법정 최고 형벌인 사형은 앞에서 서술하였듯이 교형과 참형으로 등급이 나뉜다. 지금 우리의 관념으로는 어떻게 죽든 죽는 것은 마찬가지라고 여길 수 있지만, 당시에는 죄의 등급에 따라 이 또한 차이를 두어 참형이 교형보다 더 무거운 형벌이었다. 이상 조선시대에는 범죄의 종류, 등급에 따라 오형 가운데 그에 걸맞는 형벌을 시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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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천

조선시대 기본적인 형벌은 오형이었지만, 실제 집행 과정에서는 오형에 제시되어 있지 않은 다양한 형량이 추가로 시행되기도 하였다. 즉,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형고(刑考)」의 제율유기(諸律類記) 항목에는 범죄 행위 유형별로 처벌 형량을 소개하고 있는데, 여기에는 앞서 소개한 오형의 형량 외에도 몇 가지 다른 형량이 보인다. 이를 모두 제시하면 장100(杖一百) 천사(遷徙), 장100(杖一百) 충군(充軍), 장100(杖一百) 변원충군(邊遠充軍), 장100(杖一百) 수군충군(水軍充軍), 도배(徒配), 장100(杖一百) 정배(定配), 물한년정배(勿限年定配), 장100(杖一百) 원지정배(遠地定配), 변원정배(邊遠定配), 극변정배(極邊定配), 장100(杖一百) 절도정배(絶島定配), 감사정배(減死定配), 위노(爲奴), 일률(一律), 효시(梟示), 교대시(絞待時), 교부대시(絞不待時), 참대시(斬待時), 참부대시(斬不待時), 능지처사(凌遲處死) 등이다. 이로써 조선시대에서 실제 형벌을 집행할 때에 오형을 기본으로 하되 필요에 따라 위에서 제시한 형량을 보완해서 적용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갑오개혁 이후에는 근대법의 영향을 받아 종래의 오형의 형벌 체계에 변화가 이루어졌다. 즉, 1894년에 제정된 「유형분등급가감례(流刑分等及加減例)」와 「징역처단례(懲役處斷例)」, 1896년에 제정된 「형률명례(刑律名例)」 등의 법령이 제정되면서 변화된 형벌 체계는 1905년 대한제국 정부에서 편한 형법서인 『형법대전(刑法大全)』에 반영되었는데, 동 형법서에 수록된 형벌은 태형(笞刑)·금옥형(禁獄刑)·역형(役刑)·유형(流刑)·사형(死刑)으로 정리되었다. 이로서 근대적 징역형이 도입되었으며, 능지형·참형 등 참혹한 전근대적 사형 집행 방법은 더 이상 법률상에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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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의

오형의 형벌 체계는 동양 전통사회의 형벌의 목적, 형벌을 통해 달성하고자 했던 유교적 응보형주의(應報刑主義) 법사상의 내용을 잘 보여준다. 아울러 조선의 오형 집행 사례는 『대명률』을 계수(繼受)하였으면서도 우리나라의 현실에 맞게 형벌을 조정할 수밖에 없었던 당시의 사회적 조건, 당대인들의 인식 등을 살펴볼 수 있다. 각종 범죄 행위가 어떤 형벌로 처벌되었는가를 면밀하게 분석한다면 조선시대 범죄 통제의 특징을 해명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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