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전(印篆)"의 두 판 사이의 차이
(XML 가져오기) |
(차이 없음)
|
2017년 12월 10일 (일) 02:36 기준 최신판
주요 정보 | |
---|---|
대표표제 | 인전 |
한글표제 | 인전 |
한자표제 | 印篆 |
상위어 | 서체(書體), 인장(印章), 전서(篆書) |
하위어 | 구첩전(九疊篆), 무전(繆篆), 상방대전(上方大篆), 소전(小篆), 지영전(芝英篆), 진전(秦篆) |
관련어 | 보전서사관(寶篆書寫官), 『전대학(篆大學)』, 『전운편람(篆韻便覽)』, 『전중용(篆中庸)』, 『전해심경(篆海心鏡)』, |
분야 | 교육·출판/출판/인장 |
유형 | 개념용어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 |
집필자 | 성인근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인전(印篆) |
인장에 새긴 전자(篆字).
개설
인전(印篆)은 인장에 새긴 전자를 일컫는 말로, 인장은 대부분 전서(篆書)로 새기기 때문에 인장 자체를 뜻하기도 한다. 또는 인장을 찍고 난 후 나타난 인영(印影)을 의미하기도 한다. 주로 인장에 사용되는 전서는 한자 서체의 하나로 예서(隸書) 이전의 서체를 포괄한다. 진시황(秦始皇)의 문자 통일을 분기로 대전(大篆)과 소전(小篆)으로 나누어지며, 상주(商周)의 갑골문·금문, 춘추전국시대의 육국(六國) 문자, 진나라의 소전, 그리고 무전(繆篆), 첩전(疊篆) 등 각 시대와 국가, 용도에 따라 무수히 많은 전서가 생성·소멸되기도 하였다.
한국에서 전서의 수용은 우선 낙랑의 유물에 포함되어 있는 봉니(封泥)를 살필 수 있고, 삼국시대의 인장, 통일신라시대의 태종무열왕릉비(太宗武烈王陵碑)·쌍계사진감선사비(雙磎寺眞鑑禪師碑) 등의 비액(碑額)에서 고려시대 이전의 양상을 살필 수 있다. 고려시대에서 조선전기까지의 금석문에서는 주로 소전체를 확인할 수 있다.
내용 및 특징
조선중기부터 전서는 좀 더 다양한 양상을 드러내고 있다. 16세기 말부터 인장에 나타나는 다양한 고전체(古篆體)와 장식 서체, 17세기 초반부터 보이는 계회도(契會圖) 표제의 폭넓은 전서의 등장이 다양한 전서 양상의 시작을 특징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다양한 전서체의 유행은 학습서 출간으로 이어졌다. 유교 경전을 전자의 학습서로 활용한 사례는 박영(朴泳)의 『전중용(篆中庸)』과 김진흥(金振興)의 『전대학(篆大學)』 등이 있다.
조선시대의 식자층이라면 『대학(大學)』과 『중용(中庸)』 등 사서의 범주는 이미 암송하고 있었으므로 이러한 전서 관련 경전은 전서의 학습은 물론, 글자를 검색하기 위한 사전적인 기능까지 가능하였으리라 여겨진다. 전서 관련 운서의 대표적 사례로 경유겸(景惟謙)의 『전운편람(篆韻便覽)』과 김진흥의 『전해심경(篆海心鏡)』 등이 있다.
조선시대 인장에 쓰인 전서는 구첩전(九疊篆)이 주류를 이룬다. 명나라로부터 국새를 받기 위해 조선에서 자체 제작한 국새인 조선왕보(朝鮮王寶)를 비롯하여 명에서 반사(頒賜) 받은 3과의 조선국왕지인(朝鮮國王之印), 그리고 조선초기에 제작된 국왕 문서용 어보들 또한 모두 구첩전이다. 조선시대 새보(璽寶)의 글자가 의도적으로 9획을 사용한 이유는 『주역(周易)』에 나오는 ‘건원용구(乾元用九)’의 의미를 인장에 함축한 것이다. 이는 고궁의 건축물과 꽃담 등에 있는 길상문의 서체가 대부분 구첩전인 점과 상통하는 현상이다.
왕실의 인장은 당시 전서에 뛰어난 사람을 뽑아 보전서사관(寶篆書寫官)으로 삼아 새기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일례로 도암(陶庵)이재(李縡)가 지은 이징하신도비명(李徵夏神道碑銘)에 따르면 이징하는 보전서사관을 지낸 것을 알 수 있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서 보전서사관을 지낸 사람을 살펴보면 선원(仙源)김상용(金尙容), 수북(水北)김광현(金光炫), 동강(東江)여이징(呂爾徵), 서곡(西谷)이정영(李正英), 운포(雲浦)여성제(呂聖齊), 문곡(文谷)김수항(金壽恒), 지수재(知守齋)유척기(兪拓基), 직하(稷下)김상복(金相福), 청헌(聽軒)이경일(李敬一), 만오(晩悟)한용구(韓用龜) 등이 있다. 이들은 당대 글씨에 뛰어난 인물들로 신도비나 묘갈, 묘비의 전액(篆額)을 많이 썼다.
변천
중원에 청이 들어서면서 조선에서는 모두 3차에 걸쳐 국새를 인수하였다. 첫 번째는 1637년(인조 15) 11월 청자(淸字, 만주어)로 새긴 국새였다. 두 번째는 1653년(효종 4)에 인수하였으며, ‘조선국왕지인’을 한자와 청자로 하나의 인장에 새겨 넣었다. 한자는 소전이며 청자는 아직 전서화되지 않았다. 세 번째는 1776년(영조 52)에 인수하였으며, 한자와 청자가 모두 전서로 지영전(芝英篆)으로 하였음이 특징이다.
대한제국 시기에 들어 새보의 서체는 구첩전에서 소전으로 크게 바뀌었다. 소전은 전서의 일종으로 진전(秦篆)이라고도 하며, 대전과는 상대 개념이다. 진시황제가 천하를 통일하고 승상이사(李斯)로 하여금 만들게 하였다고 전한다. 소전을 만들 당시에 진나라의 문자를 중심으로 여기에 합치되지 않는 다른 나라들의 문자를 모두 폐지하였다.
소전은 이전의 문자에 비해 균일하며 이상적인 형태로 나타나는데 제왕의 냉엄한 권위가 담겨 있다. 따라서 중국을 통일한 진나라와 시황제의 자긍심이 담긴 서체로 인식된다. 이후 한대(漢代)로 넘어와 예서의 시대에도 전서는 인장과 비액에 쓰이는 공식적 서체로 남았고, 이러한 전통은 이후로 변함이 없었다.
참고문헌
- 『전중용(篆中庸)』
- 『전운편람(篆韻便覽)』
- 『전대학(篆大學)』
- 『전해심경(篆海心鏡)』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 梁披雲 主編, 『中國書法大辭典』(영인본), 미술문화원, 1980.
- 정경일, 「조선시대의 운서이용 양상」, 『한국어학』7, 19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