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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2:36 기준 최신판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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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이왕직박물관 |
한글표제 | 이왕직박물관 |
한자표제 | 李王職博物館 |
동의어 | 이왕가박물관(李王家博物館), 제실박물관(帝室博物館) |
관련어 | 궁내부(宮內府), 명정전(明政殿), 이왕가미술관(李王家美術館), 자경전(慈慶殿), 창경궁(昌慶宮), 창경궁박물관(昌慶宮博物館), 창경원박물관(昌慶苑博物館) |
분야 | 문화/예술/미술 |
유형 | 개념용어 |
지역 | 창경궁(昌慶宮) |
시대 | 대한제국〜일제시대 |
왕대 | 대한제국〜일제시대 |
집필자 | 탁현규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이왕직박물관(李王職博物館)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순종실록부록』 7년 3월 5일 |
순종대에 창경궁에 설립된 우리나라 최초의 박물관.
개설
이왕직박물관(李王職博物館)은 1909년(순종 2)에 창경궁 내 명정전(明政殿) 일대를 전시실로 삼아 설립되었는데 근대적 의미에서 우리나라 박물관의 효시라고 할 수 있다.
1907년(순종 즉위) 순종이 즉위한 후, 덕수궁에서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겼다. 이후 창덕궁 후원에 인접한 창경궁에 동물원, 식물원과 함께 설립되었다. 1938년 새로 지어진 덕수궁 석조전 신관에 이왕직박물관 수장품이 이전되면서 1933년에 설립된 이왕가미술관(李王家美術館)에 통합되었다.
명칭
『조선왕조실록』에는 이왕직박물관이라는 명칭이 나오나 1909년에 박물관이 세워졌을 때 정확한 명칭은 없었다(『순종실록부록』 7년 3월 5일).
1908년(순종 1) 『대한매일신보』 1월 9일 기사와 1910년(순종 3) 6월 한일합병 이전에 제작된 박물관 본관 신축을 위한 2장의 설계도면을 보면 당시 ‘제실박물관(帝室博物館)’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다. 그 시기 공식적인 문서에는 대한제국의 박물관이라는 의미의 제실박물관으로 표기하였으나 신문이나 잡지 등의 언론에서는 일반적으로 ‘창경원박물관’ 또는 ‘창경궁박물관’이라 하였다.
1910년 8월 한일합방으로 황실이 왕실로 격하되어 궁내부(宮內府)가 이왕직(李王職)이라는 명칭으로 바뀌면서 이왕직 소속의 박물관이란 의미로 이왕직박물관 또는 이왕가박물관(李王家博物館)이라고 하였다. 1912년 박물관 소장품을 소개한 『이왕가박물관소장품사진첩』이 발간되면서 이후 공식적으로 이왕가박물관으로 불렸다.
변천
(1) 설립
박물관은 일제가 순종의 거처를 덕수궁에서 창경궁으로 옮기기 위한 공사를 계획하면서 순종의 무료함을 달래줄 오락거리로 동물원, 식물원과 함께 설립되었다. 최초의 근대적 박물관인 이왕가박물관의 설립은 당시 한일합병을 앞두고 나라가 어지러운 상황에서 일본에 의해 주도되었다.
1909년 처음 개관했을 때에는 별도의 건물 없이 창경궁 내의 명정전, 경춘전(景春殿), 환경전(歡慶殿), 통명전(通明殿), 양화당(養和堂), 함인정(涵仁亭) 등 7개의 전각(殿閣)을 전시실로 사용하였다. 당시의 전시 구성을 보면, 명정전에는 석각류, 명정전 행각(行閣)에는 조선시대 토속품과 석기시대 석기류, 경춘전에는 조선시대 도기와 옥석기류, 환경전에는 조선시대 금속기, 통명전에는 회화류, 양화당에는 고구려 고분벽화 모사도, 함인정에는 일본과 중국에서 제작된 물품들을 참고 품목으로 전시하였다. 그해 11월 순종의 산책을 위해 휴관하는 목요일을 제외하고는 일반인들의 관람이 가능하도록 개방하였다.
(2) 운영
1911년 11월 30일 창경궁 자경전(慈慶殿) 터에 일본과 서양의 건축 양식을 절충한 지하 1층, 지상 2층 규모의 박물관 본관 건물을 신축하였다. 한일합병 이후 박물관의 운영은 장원계(掌苑係)에서 담당하였으며 총 7명의 직원이 시설과 소장품을 관리하였다. 박물관 전시 외에도 일본에 소장품을 보내 전시하기도 하였으나 1914년 고려 도요지에 관한 2편의 보고서를 낸 것 외에는 발굴과 연구 관련 보고서 등을 발간한 적이 없다. 즉, 학술적인 기관으로 운영되지는 않았던 것이다.
『이왕가박물관소장품사진첩』에 따르면 1912년 당시 소장품은 총 12,230점이 있었는데 그 종류도 불상, 석조, 칠기, 자수 및 직물, 도기, 회화 등으로 다양하였다. 유물들은 왕실 전래품, 발굴에서 나온 부장품, 시중에서 구입한 것 등 3가지 경로를 통해 소장되었는데 이 중 왕실 전래품보다는 구입 유물들이 주를 이루었다. 당시 박물관의 전시 방식은 역사적인 가치나 순서로 유물의 중요도를 정하기보다는 일본인들의 수집 취향에 따라 정해졌다. 시중에서 값 비싸게 구입한 신라와 고려의 금속공예, 불상, 도자기 등이 중요 유물로 다루어진 데 반해 조선의 유물들은 상대적으로 소홀히 취급되었다.
(3) 폐관
일본은 고종이 승하한 뒤, 덕수궁을 공원으로 개방하면서 1933년 덕수궁의 가장 큰 서양식 건물인 석조전을 개조하여 일본의 근대 미술품들을 전시하는 이왕가미술관을 개관하였다.
1936년 창경궁에 있던 이왕가박물관의 건물이 협소하고 채광과 진열품 보존에 문제가 있어 새 건물을 지을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더불어 일본 근대 미술품만 전시하는 이왕가미술관에 조선의 고미술을 관람할 수 있는 신관을 건축하여 함께 보여주자는 논의가 있었다. 이에 1938년 석조전 서쪽에 신관을 개축하여 이왕가박물관 소장품들을 이전하면서 이왕가박물관은 이왕가미술관에 자연스럽게 통합되었다.
참고문헌
- 목수현, 「일제하 이왕가박물관의 식민지적 성격」, 『미술사학연구』 227호, 한국미술사학회, 2000.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