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화당(養和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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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경궁 북쪽에 위치한, 내전 영역의 대비전으로 사용하던 당(堂).

개설

1483년(성종 14)에 세조 비 정희왕후(貞熹王后)와 예종 비 안순왕후(安順王后), 덕종 비 소혜왕후(昭惠王后)를 모시기 위해 옛 수강궁(壽康宮) 터에 창경궁을 조성할 당시 건립되었다. 당시 의정부(議政府) 좌찬성(左贊成)서거정(徐居正)이 건물의 이름을 지어 올렸다(『성종실록』 15년 2월 11일).

17세기까지 왕이 신료들을 만나는 공간으로 사용되었으나, 영조 이후 대비전에서 주로 사용하거나 세자빈의 거처로 사용되었다. 「동궐도(東闕圖)」와 「동궐도형(東闕圖形)」, 『창경궁영건도감의궤(昌慶宮營建都監儀軌)』 도설(圖說)에서 양화당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1833년(순조 33)에 영건된 모습으로 현재 창경궁에 남아 있다.

위치 및 용도

통명전(通明殿)의 동쪽, 환경전(歡慶殿)과 경춘전(景春殿)의 북쪽에 자리하고 있으며 창경궁의 후원에 인접해 있다. 후원에 가까워 명종은 양화당 뒷마당에서 유생들을 불러 글을 짓게 하여 시험을 보고, 참여한 신료들에게 술을 내리기도 하였다. 임진왜란 이후 광해군은 정월 초하룻날 선조의 혼전인 영모전(永慕殿)에 제사를 올렸는데, 그 전날 양화당에서 재숙(齋宿)하였다. 1609년(광해군 1)에는 어머니께서 동궁의 처소인 저승전(儲承殿)에 머물고 있는 것이 미안하다고 하며 양화당의 사정합을 자전(慈殿)의 처소로 삼으려 하였다(『광해군일기』 1년 12월 30일).

양화당을 가장 많이 사용한 왕은 인조였다. 병자호란이 있던 1636년(인조 14)에 청나라 군대가 돌아가자 인조는 남한산성에서 환도하여 양화당에 거처하였다. 여기에서 신하들을 만나고, 청나라 사신을 접견하기도 하였다(『인조실록』 22년 1월 20일).

17세기 이후에는 양화당을 대비전에서 주로 사용하였다. 1664년(현종 5)에 인선왕후(仁宣王后)는 부모가 되는 신풍부원군(新豊府院君)·영가부부인(永嘉府夫人)의 묘소를 이장할 때 양화당에서 망궐례를 행하였다(『현종실록』 5년 8월 3일). 1726년(영조 2) 9월에는 통명전에서 왕대비전에 존호를 올리고, 양화당에서 왕비의 책봉례를 행하였다(『영조실록』 2년 9월 10일). 1730년(영조 6)에는 양화당을 빈궁(嬪宮)의 처소로 기록하고 있다. 1878년(고종 15)에는 철인왕후(哲仁王后)가 양화당에서 승하하였다. 양화당의 위치가 대비전으로 사용하던 통명전, 자경전(慈慶殿)에 가까워 대비가 사용하기 쉬웠던 것으로 보인다.

변천 및 현황

양화당은 1483년(성종 14)에 건립되어 임진왜란 중에도 소실되지 않았다. 1790년(정조 14) 통명전에 큰 불이 났을 때에도 양화당에는 불이 옮겨 붙지 않아 화재를 면하였다. 1672년(현종 13)에는 양화당이 오래되어 기울어지고 무너진 곳이 있어 개수하였다. 1730년(영조 6)에 창경궁 경극당(敬極堂)과 집복헌(集福軒) 등의 온돌 아래에서 흉물이 나오는 사건이 발생하여 양화당도 철거 후 개수하였다. 이때 건물의 몸체는 3칸이고 사면에 툇마루를 갖춘 건물이었다고 한다.

1830년(순조 30) 3월 창경궁 내전에 대규모 화재가 일어 경춘전과 환경전·양화당·함인정(涵仁亭) 등이 모두 소실되었다. 이에 1833년(순조 33)에 새롭게 영건하였다. 순조 연간에 새로 건립하면서 정면 6칸으로 변화되었으며, 중앙 마루를 중심으로 좌우 온돌의 규모가 같아 좌우 대칭의 평면을 갖게 되었다. 1833년 이전의 양화당 모습은 「동궐도」를 통해 알 수 있으며, 새롭게 조성된 모습은 『창경궁영건도감의궤』의 도설을 통해 비교해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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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궁궐지(宮闕志)』
  • 『창경궁영건도감의궤(昌慶宮營建都監儀軌)』「동궐도(東闕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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