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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2:33 기준 최신판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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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어보 |
한글표제 | 어보 |
한자표제 | 御寶 |
상위어 | 국새(國璽) |
하위어 | 과거지보(科擧之寶), 광운지보(廣運之寶), 규장지보(奎章之寶), 동문지보(同文之寶), 명덕지보(命德之寶), 소신보(昭信寶), 옥새(玉璽), 이덕보(以德寶) |
동의어 | 대보(大寶) |
관련어 | 가상존호보(加上尊號寶), 보장(寶欌), 시호(諡號), 시호보(諡號寶), 어책(御冊), 존호(尊號), 존호보(尊號寶), 종묘(宗廟), 책봉(冊封), 추상존호보(追上尊號寶) |
분야 | 교육·출판/출판/인장 |
유형 | 개념용어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대한제국 |
왕대 | 태조~순종 |
집필자 | 성인근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어보(御寶)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정종실록』 1년 10월 8일, 『정종실록』 2년 6월 20일 |
조선시대에서 대한제국 시기 왕실 인사의 위호(位號)를 나타낸 공식 인장.
개설
어보(御寶)는 왕실의 끊임없는 정통성의 상징으로 어책(御冊)과 함께 사후 종묘에 봉안하였다. 세습 왕으로서 조선의 왕은 출생 후에 차례로 원자, 왕세자, 왕에 책봉되었으며 이 봉작명 및 봉작에 따르는 경칭이 그대로 호칭이 되기도 하였다. 세상을 떠난 후에는 생전의 행적과 공덕을 시(諡)와 호(號)로 드러낸다는 유교적 관례에 따라 시호(諡號)를 받았다. 이렇게 살아생전 받은 호칭들, 그리고 사후에 받은 호칭들은 국가적 의례를 통하여 인장과 책문으로 제작하였고, 사후 종묘에 고스란히 봉안되었다.
인장은 왕의 경우 왕세자 책봉 때의 옥인(玉印), 등극 이후의 존호, 사후의 존호·시호를 올릴 때, 왕비의 경우 세자빈 책봉 때의 옥인, 왕비 책봉 때의 왕비보, 생시의 존호, 사후의 존호·시호·휘호를 올릴 때 새겼다. 여러 호칭을 올릴 때마다 책보도감(冊寶都監)을 설치하여 옥책(玉冊)과 어보를 제작하였고, 존호를 새긴 인장을 존호보, 시호를 새긴 인장을 시호보라 하였다. 또한 사안에 따라 가상존호보, 추상존호보 등으로 불렀다.
종묘에는 역대 왕과 왕비의 신주가 있는 신실마다 동쪽에는 보장(寶欌)을 두어 어보를, 서쪽에는 책장(冊欌)을 두어 어책을 봉안하였다. 어보는 조선 왕실의 상징성이 담긴 신성한 비장품으로 존숭의 대상이었다. 종묘의 정전에는 모두 19실이 있어 건국 시조인 태조를 비롯하여 태종, 세조, 선조, 숙종, 영조, 순종 등 19명의 왕과 왕비 30명을 모셨다. 영녕전에는 태조의 선대인 목조, 익조, 도조, 환조를 비롯하여 적통에서 밀린 정종, 문종, 단종, 경종 등과 추존 왕인 원종, 장조 등이 왕비와 함께 모두 16실에 봉안되어 있다. 현재 어보와 어책 대부분은 국립고궁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내용 및 특징
왕을 비롯한 왕실 인사는 여러 호칭을 가지며 크게 생시와 사후로 구분된다. 예컨대 왕의 경우 아명·명·자·호·봉작명 등은 생시의 호칭이며, 시호·묘호·능호·전호 등은 사후의 호칭이다. 이 가운데 생시의 호칭은 성장 과정에 따라 유교적 통과 의례를 거치면서 얻는 호칭과 세습 왕으로서 얻는 봉작 명으로 구별되었다.
종묘에 봉안된 어보는 이러한 왕실 인사의 호칭과 밀접한 관련이 있으며 크게 두 가지 경우에 제작하였다. 첫째, 왕세자·왕세자빈·왕세제·왕세손·황태자·황태자비·왕비·황후 등의 책봉 때, 둘째 행적을 기리는 호칭인 시호, 칭송의 호칭인 존호, 종묘 신실의 이름인 묘호, 왕비에게 따로 올리는 휘호 등 주로 존숭의 경우에 각각의 어보가 제작되었다.
현재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는 조선시대의 『존호도감의궤(尊號都監儀軌)』·『존숭도감의궤(尊崇都監儀軌)』·『상호도감의궤(上號都監儀軌)』는 56종 212건에 이른다. 장서각에도 대략 50종이 소장되어 있으며, 파리국립도서관과 일본궁내청에도 소장되어 있다. 이 세 곳에 소장되어 있는 의궤의 종류는 모두 규장각에도 소장되어 있으므로, 조선시대의 관련 의궤는 대략 56종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시대에 존호는 주로 살아 있는 왕의 공덕을 찬양하기 위한 호칭으로 사용되었다. 조선의 왕으로서 생전에 존호를 받은 최초의 왕은 태조이성계(李成桂)였다. 1399년(정종 1) 10월 권근(權近)은 상소문을 통해 태조에게 존호를 올려야 한다고 요청하였고, 근거로 “근심하며 부지런히 덕을 쌓아 왕업을 창건하고 대통을 전하여 억만년 무궁한 기업(基業)을 열어 전하게 하였으니, 높은 공과 성한 덕이 하늘과 더불어 다함이 없다.”는 내용을 제시하였다(『정종실록』 1년 10월 8일).
이에 따라 1400년(정종 2) 6월 태조에게 존호를 올리기 위한 봉숭도감(封崇都監)을 설치하고 ‘계운신무(啓運神武)’라는 넉 자의 존호를 올렸다(『정종실록』 2년 6월 20일). 태조이성계가 신무(神武)로써 조선을 창업한 공덕을 드러내는 호칭이었다. 이후로 조선시대에는 살아 있는 왕의 업적을 찬양하기 위한 존호가 무수히 올려졌다.
종묘에 봉안된 어보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분실되거나 파손되었는데, 오랜 시간이 지나도록 수리하지 못하다가 1705년(숙종 31)에 이르러 없어진 금보(金寶)를 보충하고 이를 보관하던 보갑(寶匣)을 수리하였다. 당시 숙종은 왕실의 권위를 높이기 위하여 태조의 4조인 목조, 익조, 도조, 환조와 왕비, 태조비 신의왕후의 금보를 처음으로 제작하여 종묘에 봉안하였다.
변천
조선시대에는 어보 목록이 여러 차례 작성되었다. 문헌으로 보이는 최초의 어보 목록은 현재 규장각에 소장된 『금보개조도감의궤(金寶改造都監儀軌)』로, 1705년에 행한 종묘와 영녕전의 보책과 보갑의 개조에 따른 의궤이다. 이 책에는 4월 13일 숙종이 친히 종묘의 보책을 봉심하고 병화(兵火)로 산실된 보책과 보갑의 조성을 해당 관에서 처리하라고 한 명에 따라 보책 및 보갑의 조성과 쇄약(銷鑰), 보채(寶綵)의 신편(新編)·보결(補缺)의 과정, 종묘와 영녕전의 각 실 보갑봉심별단(寶匣奉審別單)이 각 실별로 자세히 기록되어 있어 숙종 이전 어보의 목록을 확인할 수 있다.
6월 16일에는 종묘와 영녕전의 각 실 보수(寶綏)·보록(寶盝)·보갑(寶匣)의 신비별단(新備別單)과 종묘와 영녕전의 각 실 보주갑봉심(寶朱匣奉審) 이후 추조(追造)한 쇄약의 신비별단과 6월 17일에 봉안되었음을 기록으로 알 수 있다. 이후 책보의 목록과 봉안 시기를 기록한 목록으로 장서각 소장 『종묘책보목록(宗廟冊寶目錄)』이 있는데, 종묘서에서 1783년(정조 7)부터 1908년(융희 2)까지 책보를 봉심할 때마다 기록하여 추가하였다.
고종대의 목록으로는 현재 장서각에 소장되어 있는 『책보록(冊寶錄)』이 있다. 종묘와 영녕전에 봉안된 어보, 어책, 교명 및 『국조보감(國朝寶鑑)』을 기록한 목록이다. 크게 종묘책보목록과 영녕전책보목록으로 구성되어 있다. 종묘에는 1실의 태조로부터 18실의 철종대까지를 정리하였으므로 고종대의 기록임을 알 수 있으나 정확한 제작 연대는 알 수 없다.
각 실마다 동장(東欌)과 서장(西欌)으로 분류하고, 전자에는 어보의 해당 인물, 제작한 해의 간지, 재질을, 후자에는 옥책의 해당 인물, 제작한 해의 간지를 기록하였다. 각 실마다 모두 「책보봉안도」를 그려 놓아 형태까지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다만 책보를 올린 주체를 기록하지 않은 아쉬움이 있다. 영녕전은 모두 15실로 구성되었는데 종묘와 마찬가지로 책보의 수와 재질 등을 총괄하였다. 『국조보감』은 각 실마다 모두 봉안되어 있다.
『책보록』과 마찬가지로 종묘의 제18실 철종대까지와 영녕전의 책보를 정리한 목록으로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를 참고할 수 있다. 이 목록에는 각각의 어보에 해당하는 보문(寶文)을 빠짐없이 수록하였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이 목록을 기준으로 보면 철종대까지 종묘와 영녕전에 봉안된 어보는 총 425과이다.
종묘에 봉안된 어보는 1961년부터 종묘사무소에서 보관하다가 1992년에 궁중유물전시관으로 이관되었다. 이후 궁중유물전시관이 옛 국립박물관으로 옮겨지고 명칭이 국립고궁박물관으로 변경되어 오늘에 이른다. 1995년에는 당시 궁중유물전시관으로 이관된 어보를 대상으로 특별전이 열렸고, 이에 따른 도록이 제작되었다. 이 도록에는 1992년 종묘사무소에서 이관되어 당시까지 소장하고 있던 조선시대 어보 목록을 수록하였다. 이 어보 목록은 앞에서 살펴본 자료들과 달리 고종과 순종대까지를 포함하였으며 이때 제작된 어보 27과를 포함하여 총 324과를 수록하였다. 철종대까지 소장하고 있는 어보의 수는 총 297과인 셈이다.
이보다 앞선 1992년에 은광준에 의해 조선시대 어보 목록이 작성되었다. 이 목록은 당시까지 현존하는 어보를 대상으로 조선시대 왕과 왕후의 묘호 및 시호를 일람한 표이다. 이 목록에는 총 304과의 어보가 집계되어 있어, 『증보문헌비고』에 정리된 425과와 무려 120여 과의 차이를 보이며, 1995년 제작한 전시 도록의 기록과는 20과의 차이를 보인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상당수의 어보가 유실되었거나 다른 곳에 이관되었음을 알 수 있다.
참고문헌
-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 『금보개조도감의궤(金寶改造都監儀軌)』(규14211)『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 『종묘책보목록(宗廟冊寶目錄)』(K2-2212)『종묘영녕전책보록(宗廟永寧殿冊寶錄)』
- 『책보록(冊寶錄)』
- 궁중유물전시관, 『조선어보! 500년 종실의 상징』, 1995.
- 은광준 편저, 『조선왕릉석물지』, 민속원, 1992.
- 김종수, 「존호, 존숭, 상호도감의궤 명칭에 대한 소고」, 『온지논총』12, 2005.
- 신명호, 「조선시대 국왕호칭의 종류와 의미」, 『역사와 경계』52, 2004.
- 임민혁, 「고·순종의 호칭에 관한 이론과 왕권의 정통성 -묘호·존호·시호를 중심으로-」, 『사학연구』78,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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