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숭도감(封崇都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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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조선초기에 책봉(冊封)이나 상존호(上尊號) 등의 업무를 수행하기 위해 설치했던 임시기관.

개설

봉숭도감(封崇都監)은 왕실 의례에 관한 업무를 전담·수행하기 위해 설치했던 임시기관으로, 고려시대부터 설치·운영되었다. 조선에서는 세종대까지만 봉숭도감이 설치·운영되었고, 그 이후에는 관련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세종대까지 봉숭도감에서 거행한 왕실 의식은 세자 책봉, 상존호, 상책보(上冊寶) 등 다양하게 나타난다. 이를 종합해 볼 때, 조선초기에는 왕실 의례를 주관하는 임시기관을 모두 봉숭도감으로 통칭한 것으로 보인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조선왕조실록』에서 봉숭도감이 처음 등장하는 것은 1400년(정종 2) 6월이다. 당시 태상왕(太上王)이던 태조에게 존호를 올리기 위해 봉숭도감을 설치했으며, 성석린(成石璘)·민제(閔霽)·하윤(河崙) 등이 제조(提調)를 맡았다(『정종실록』 2년 6월 16일). 태종대에는 1404년(태종 4) 훗날 양녕대군(讓寧大君)이 되는 세자의 책봉을 위해 세자봉숭도감(世子封崇都監)을 설치했으며(『태종실록』 4년 7월 20일), 1418년(태종 18)에도 충녕대군(忠寧大君)을 세자로 책봉하기 위한 봉숭도감을 설치하고 관련 의주를 마련하도록 하였다(『태종실록』 18년 6월 3일).

세종대에는 1418년(세종 즉위) 상왕(上王) 태종과 대비 원경왕후(元敬王后)에게 책보(冊寶)를 올리기 위해 봉숭도감을 설치했으며(『세종실록』 즉위년 8월 12일), 1421년(세종 3) 8월에는 세자 책봉을 위해 세자봉숭도감을 설치하였다(『세종실록』 3년 8월 22일). 같은 해 9월에는 당시 태상왕이던 정종에게 존호를 올리기 위해 봉숭도감을 설치한 일이 있다(『세종실록』 3년 9월 7일).

조직 및 역할

조선시대 국가 전례서에는 봉숭도감에 관한 기록이 없고, 현전하는 의궤(儀軌)에도 봉숭도감의궤는 없기 때문에 봉숭도감이 어떤 조직을 갖고 있었는지는 정확히 알기 어렵다. 다만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내용을 바탕으로 대략적인 윤곽을 유추해 볼 수 있다. 먼저, 1418년 8월 상왕 태종과 대비 원경왕후에게 책보를 올리기 위해 설치된 봉숭도감에서는 박은(朴訔)·이원(李原)을 도제조(都提調)에, 박신(朴信)·허지(許遲)·허조(許稠)·이명덕(李明德)을 제조(提調)에 임명하였다(『세종실록』 즉위년 8월 12일). 1421년(세종 3) 9월에 태상왕 정종에게 존호를 올리기 위해 설치한 봉숭도감의 경우에는 허조·원숙(元肅)이 제조를, 권맹손(權孟孫)·김효정(金孝貞)이 부판사관(副使判官)을 맡았다(『세종실록』 3년 9월 7일). 이상의 사례를 볼 때, 봉숭도감의 조직은 항상 동일하지는 않았으며, 대체로 도제조·제조·부판사관 등으로 구성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봉숭도감의 담당 업무는 기본적으로 의식을 준비하고 진행하는 것이며, 1418년(태종 18) 6월에 설치된 세자봉숭도감의 경우처럼 의주(儀註)를 마련하는 일을 담당하기도 했다.

변천

『조선왕조실록』 기록 상 조선에서의 봉숭도감은 세종대까지만 설치·운영되었고 그 이후에는 설치 사례가 보이지 않는다. 현전하는 의궤 중에 봉숭도감의궤가 없는 것은 늦어도 17세기부터는 봉숭도감이 설치되지 않았음을 보여 준다. 봉숭도감이 설치·운영되지 않은 이유는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아마도 국가 의례가 정비되면서 도감의 이름도 의례에 따라 존호도감(尊號都監)·책례도감(冊禮都監) 등으로 구체화된 결과 봉숭도감이라는 명칭은 더 이상 쓰이지 않게 된 것으로 여겨진다.

참고문헌

  •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 『동문선(東文選)』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