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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2:33 기준 최신판



신의왕후의 능인 제릉의 능침사로, 경기도 개풍군부소산에 위치했던 절.

개설

연경사(衍慶寺)는 경기도 개풍군부소산(扶蘇山)에 위치한 사찰로 7세기 초에 창건되었다고 전한다. 고려말과 조선초에 중창되었으며 세종대 선·교 양종 36사 정비 당시 교종 사찰 가운데 하나였다. 태종의 모후인 신의왕후(神懿王后)의 제릉(齊陵)을 위한 능침사(陵寢寺)로서 조선시대 내내 왕실에 의해 매우 중시된 사찰이었다.

연원

연경사는 고구려 때인 624년(고구려 영류왕 7) 혜량(惠亮)이 창건했다고 전한다. 이후 연혁은 알려져 있지 않으며 고려말인 1349년(고려 충정왕 1)에 신욱(信旭)이 중창하였다. 조선이 개국한 1392년(태조 1) 각해(覺海)가 다시 중창하였다.

변천

조선시대에 들어 억불 정책을 본격적으로 단행한 태종이었지만 독실한 숭불 군주였던 부왕 태조와 모후를 위한 법회 및 불사는 시행하였다. 1408년(태종 8) 태조가 세상을 뜨자 산릉의 재궁(齋宮)조계종(曹溪宗)에 속한 개경사(開慶寺)로 하였고 노비 150명과 전지 300결을 주었다. 또 해풍(海豊) 연경사에는 원래 보유하던 사원노비 80명에 추가로 20명을 더해 주었다(『태종실록』 8년 7월 29일). 그 다음해에는 연경사에 토지 100결을 하사하였다(『태종실록』 9년 6월 9일). 이듬해 태종은 모후인 신의왕후의 제릉에서 제를 지내고 비각을 짓게 하였으며 재궁인 연경사를 직접 둘러보았다(『태종실록』 10년 3월 18일). 이때 연경사의 중창 공역을 마치자 태종은 모후의 명복을 기원하며 사재를 내어 『법화경(法華經)』 법회를 설하였고 흥교사(興敎寺)의 탑을 연경사로 옮기게 하였다(『태종실록』 10년 4월 6일) (『태종실록』 10년 4월 8일).

1424년(세종 6) 세종은 기존의 7개 종단을 선·교 양종으로 나누고 각각 18개씩 36개 사찰만 공인하였는데, 이때 연경사는 교종 18사 중 하나로 지정되었다. 연경사는 태종 등의 지원에 의해 보유 토지가 300결이나 되었는데 이때 추가로 100결이 더 지급되었고 거주 승려도 200명이나 허용되었다(『세종실록』 6년 4월 5일). 이는 교종 18개사 가운데 최고 규모로서 도회소였던 흥덕사가 원속전 250결, 거주 승려는 120명이었던 것과 비교하면 상당한 수치였다. 선종 소속이었지만 태조의 재궁인 개경사 또한 연경사와 마찬가지로 토지 400결, 거주 승려 200명이 허용되었다. 이는 선종 18개 사찰 가운데 회암사(檜巖寺)에 이어 두 번째에 해당하는 큰 규모였다. 『세종실록』「지리지」해풍군 조항에는 신의왕후의 제릉 동쪽 골짜기에 재궁인 연경사가 위치하며 교종 소속으로 전지 400결을 내려주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세조대에도 연경사에 왕이 친히 행차하거나 곡식을 하사하였고, 성종대에는 절에서 열린 반승(飯僧) 행사에 매년 소금 93석 이상을 국고에서 냈다(『성종실록』 18년 1월 23일). 명종대에는 제릉의 능침사인 연경사와 정종의 능인 후릉(厚陵)의 능침사인 흥교사가 전각이 오래되어 수리 중이므로 태조의 옛 사저인 목청전(穆淸殿)의 고사목(枯死木)을 가져다 쓰게 하였다(『명종실록』 7년 11월 6일). 18세기 후반의 정조대에도 제릉의 석물을 수리하는 일에 연경사 승려들이 참여하여 상을 받기도 하였다(『정조실록』 20년 8월 30일). 조선후기에 몇 차례의 중수를 거쳐 이어져 왔지만 한국전쟁 후 현재는 폐사가 된 상태이다.

참고문헌

  •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 권상로, 『한국사찰전서』, 동국대학교출판부, 1979.
  • 사찰문화연구원, 『북한사찰연구』, 한국불교종단협의회, 1993.
  • 이능화, 『조선불교통사』, 신문관, 1918.
  • 탁효정, 「조선시대 왕실원당 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12.
  • 高橋亨, 『李朝佛敎』, 寶文館, 1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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