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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2:30 기준 최신판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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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습진 |
한글표제 | 습진 |
한자표제 | 習陣 |
동의어 | 진법(陣法) |
관련어 | 강무(講武), 대열(大閱), 오위진법(五衛陣法) |
분야 | 정치/군사·국방/병법·훈련법 |
유형 | 개념용어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 |
집필자 | 노영구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습진(習陣) |
중앙과 지방의 군사들이 진법(陣法) 운용을 익히는 훈련.
개설
조선 건국 직후부터 여러 차례 정비된 진법을 군사들이 익히기 위해 진법 훈련의 시행을 강조하였다. 초기에는 군사 훈련에서 진법 훈련과 함께 사냥을 통한 군사 훈련, 이른바 강무(講武)의 비중이 상당히 컸으나, 문종대 새롭게 『진법』이 편찬되면서 이후 진법 훈련인 습진(習陣)이 매우 강조되었다. 습진에 대한 규정은 이미 태종대의 『속육전(續六典)』에 마련되었고 1450년(세종 31) 양성지(梁誠之)의 건의를 계기로 본격적으로 논의되어 이후 『경국대전(經國大典)』에 이르러 법제화되었다. 습진은 조선후기에도 중앙의 군영과 지방에서 계속 시행되었다.
내용 및 특징
조선시대 진법은 이미 고려 말에 이제현(李齊賢)에 의해 최초 마련되었고 이후 1398년(태조 7) 당시 요동 정벌을 추진하던 정도전(鄭道傳)에 의해 체계화되었다. 아울러 태조대부터 진법 훈련이 실시되었다. 그리고 세종 초인 1421년(세종 3) 변계량(卞季良)에 의하여 「진도법(陣圖法)」이 제정되고 이후 『계축진설(癸丑陣說)』 등 몇 차례 진법이 개량되었다. 1451년(문종 1) 대규모 군사 운용이 가능한 진법 체제인 오위진법(五衛陣法)이 마련되고 『진법』이라는 이름으로 간행되어 군사들의 진법 훈련에 기준이 되었다. 진법의 개량에 따라 진법 훈련이 법전에 규정되기 시작하였는데, 『속육전』에 의하면 제도(諸道)의 병마도절제사(兵馬都節制使)가 도회관(都會官)을 정하여 부근의 제읍(諸邑)을 소속시켜, 농한기마다 군사를 불러 모아 진법을 연습시키도록 하였다. 이후 『진법』 제정을 계기로 단종대에는 각 고을에서 수령의 감독하에 매년 2월 2일과 10월 2일에 경내의 하번군사(下番軍士)와 영진군(營鎭軍), 수성군(守城軍)을 징집하여 진법 훈련을 실시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변방 지역인 양계(兩界)의 강변 제읍의 구자(口子)와 다른 도 연변(沿邊)의 여러 영진(營鎭)의 군사들은 매월 초2일과 22일에 진법 훈련을 실시하도록 하였다.
이후 습진 규정은 『경국대전』에 다시 정비되었는데 이에 의하면 중앙군인 경군(京軍)은 임금의 친림(親臨)하에 입번(入番) 및 순작(巡綽)하는 자를 제외하고 매월 2, 16일에 교외(郊外)에서 습진하도록 하였다. 임금의 친림이 어려울 경우에는 임금의 지정을 받은 장수가 습진을 지휘하도록 하였다. 여러 장수들의 능숙 여부를 기록하여 임금에게 보고하며 세초(歲抄) 때에 성적을 통산하여 승진이나 강등하도록 하였다. 지방군은 농사철을 제외하고 매월 16일 제진(諸鎭)별로 각기 습진하도록 하되 잡색군(雜色軍)은 제외하였다. 그리고 2월과 10월에 거진(巨鎭) 소속의 제진 군사들이 식량을 싸가지고 거진 단위로 진을 바꾸어 가면서 진법 훈련을 하도록 하였다.
변천
조선후기에는 습진 훈련이 계속되었다. 도성에 주둔하고 있는 훈련도감, 어영청, 금위영 등 세 군영에서는 교외에서 매월 세 차례 습진을 하도록 『속대전』 등 법전에 규정되었다. 구체적으로 훈련도감은 9, 19일, 29일, 금위영은 10, 20, 30일, 그리고 어영청은 1, 11, 21일에 하도록 하였다. 경기군인 총융청(摠戎廳) 소속 4영의 군사 훈련은 장단과 파주, 수원과 남양을 남북으로 나누어 각각 2영씩 돌아가며 훈련하도록 하였다. 지방군의 경우에는 병마절도사 혹은 영장(營將)이 관내를 돌아다니며 각 고을의 속오군(束伍軍)과 세초군(歲抄軍)을 함께 사열하고 활쏘기를 시험하기도 하였다. 특히 조선후기에는 국왕의 친림하에 대규모 군사를 동원하여 훈련을 실시하고 이를 사열하는 대규모 열무(閱武)인 이른바 대열(大閱)을 10여 차례 행하였다. 이때에는 주로 습진 훈련과 쌍방 훈련을 많이 하였다.
의의
전근대의 전투는 무기의 우월 못지않게 지형과 상황에 적합한 진법을 통해 상대에 비해 우월한 전투력을 해당되는 지점에 집중하는 것이 승패를 가르는 요소였다. 따라서 진법을 익히는 것은 매우 중요한 군사 훈련이었다. 조선전기 다양한 진법서가 간행되고 이를 익히기 위한 훈련인 습진이 강조된 것은 당연한 일이다. 기병 전술이 강조되던 시기에는 사냥을 통한 훈련인 강무의 비중도 적지 않았으나 이후 기병과 보병의 통합적인 전투력이 강조되고 다양한 화약무기가 등장하던 상황에서는 진법 훈련의 비중이 더 커졌다. 이러한 진법 훈련은 조선후기 군사 훈련에서도 계속 강조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규모도 대열 등에서 보듯이 매우 커졌다. 습진의 성쇠는 전근대 전술 및 군사체제의 변화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이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대전회통(大典會通)』
- 『만기요람(萬機要覽)』
- 노영구, 「조선후기 漢城에서의 閱武 시행과 그 의미 - 大閱 사례를 중심으로 -」, 『서울학연구』32, 2008.
- 이현수, 「조선중기 講武 施行事例와 軍事的 기능」, 『군사』45, 2002.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