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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2:30 기준 최신판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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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선양 |
한글표제 | 선양 |
한자표제 | 禪讓 |
관련어 | 요(堯), 순(舜), 우(禹), 무무(武舞), 문무(文舞) |
분야 | 문화/인문학/유학 |
유형 | 개념용어 |
집필자 | 김봉곤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선양(禪讓)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세종실록』 6년 6월 14일, 『숙종실록』 24년 12월 27일 |
덕망이 높은 사람에게 왕의 지위를 물려주는 것.
개설
선양(禪讓)은 혈연관계가 없어도 덕망이 높은 사람에게 왕의 자리를 물려주는 것을 말한다. 예로부터 선양은 평화로운 역성혁명의 방식을 일컬어왔다. 중국에서는 고대로부터 천명은 덕이 있는 자에게 옮겨간다는 관념이 정립되어 있었다. 『시경(詩經)』「대아(大雅)」 문왕(文王) 편에 "천명은 언제나 일정하지 않다."고 하여, 천명은 덕이 있는 자에게 옮겨가게 된다고 하였다. 특히 맹자는 천자의 자리는 하늘이 준 것이며 그 구체적인 드러남은 민의에 있다고 보았다. 예컨대 요임금이 순 임금, 순임금이 우임금에게 천하를 양위한 것은 모두 하늘과 민의에 의해서라는 것이다.
우 이후 중국은 왕위 세습제가 확립되고 요와 순처럼 왕위를 선양하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덕망이 있는 사람이 물려받는 선양을 이상적으로 여겨, 왕조가 교체할 경우 선양의 형식을 빌려서 즉위하였다. 전한(前漢)의 외척이었던 왕망(王莽)이 신(新)을 건국하면서 황위를 물려받거나, 삼국시대에 조비(曹丕)가 한의 헌제(獻帝)로부터, 송 태조 조광윤(趙匡胤)이 후주의 공제(恭帝)에게서 제위를 물려받은 경우 모두 선양의 형식을 빌렸다. 사실상 선양은 왕위 찬탈을 미화하는 대의명분으로 사용되었던 것이다. 송대의 주희 역시 한을 찬탈한 왕망과 조비에 대해 선양을 인정하지 않았으며, 한의 정통은 조비가 세운 위(魏)가 아니라 유비가 세운 촉한(蜀漢)이 계승하였다고 주장하였다.
내용 및 특징
조선도 선양의 형식을 빌려 즉위한 왕이 있다. 바로 2대 정종과 3대 태종이다. 정종은 1398년 9월 태조이성계로부터 선양을 받아 즉위하였고, 태종은 다시 2년 뒤에 정종으로부터 선양을 받아 즉위하였다[『정종실록』 총서]. 이후 세종은 정벌로 천하를 얻으면 무무(武舞)를 추고, 선양으로 천하를 얻으면 문무(文舞)를 먼저 연주하게 하였다. 이에 태조에게는 무무가 연주되고, 태종에게는 문무가 연주되었다(『세종실록』 6년 6월 14일).
이후 세조도 단종에게서 선양을 받았다. 그러나 단종의 왕위 선양은 한명회, 권람 등의 강요에 의한 것이었으며, 단종은 왕위에서 물러난 2년 뒤에는 영월로 유배되어 결국 죽음을 당하였다. 세조의 선양은 허울 좋은 명분이었을 뿐 실제적으로는 왕위 찬탈에 불과했다. 조선후기 숙종대에 이르러서야 순이 우에게 왕위를 물려준 것처럼 선양하고 공고한 기업이 면면히 계속되기를 도모했다고 하여 묘호를 단종으로 추증하고 교서를 반포하였다(『숙종실록』 24년 12월 27일).
참고문헌
- 유교사전편찬위원회 편, 『유교대사전』, 박영사, 1990.
- 溝口雄三·丸山松幸·池田知久, 『中國思想文化辭典』, 東京大學出版會,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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