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조권(收租權)"의 두 판 사이의 차이

sillok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XML 가져오기)
 
(차이 없음)

2017년 12월 10일 (일) 02:29 기준 최신판



토지에 대한 세금, 즉 ‘조(租)’를 거둘 수 있는 권리.

개설

조선시대 세금은 토지나 인신(人身)·호(戶) 등 다양한 기준으로 부과되었다. 이 중 토지에 부과된 세금이 ‘조(租)’였다. 본래 모든 토지는 왕의 것이라는 왕토사상(王土思想)에 기반하여, 모든 토지는 수확의 일정 부분을 국가에 납부하도록 되어 있었다. 비록 왕토사상이 실제 소유 관계를 규정하는 것은 아니었으나, 토지에 대한 과세 이념으로 활용되었다. 따라서 토지에 대해 조를 거둘 수 있는 권한은 궁극적으로 왕에게서 파생되었다.

국가를 운영해 나가려면 일정한 재원이 필요하며, 이러한 재정은 기본적으로 세금으로 충당되었다. 국가 인구의 절대 다수가 농업에 종사하는 조선시대에 전세(田稅)에 해당하는 조는 국가 세입에서 절대적 비중을 차지하였다. 그런데 화폐경제가 충분히 발전하지 못하고 수송 능력 또한 제한되었던 전통 시대에, 모든 세금을 중앙에 집중하고 다시 재정이 필요한 곳에 분배하는 방식은 운송·보관에 따른 부담이 클 뿐만 아니라 효율적이지도 못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세금을 징수할 수 있는 권한을 각 재정 기관에 부여하여 스스로 재원을 조달할 수 있도록 하는 방식이 허용되었다. 이에 따라 토지에 대한 조를 거둘 수 있는 권리, 즉 수조권의 분배는 국가의 재정 운영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게 되었다.

한편 수조권은 국가 업무에 봉사하는 관원들의 경제적 보상으로도 주어졌다. 즉, 관료군이나 일부 군인, 특수 업무 종사자 등에게도 수조권이 부여되었다. 특히 과전법은 관원을 대상으로 수조권을 분배하던 제도로서, 조선건국 과정에서 중요한 경제적 기틀이 되었다.

내용 및 특징

수조권의 분배는 크게 나누면 각 관서에 분배된 것과 개인에게 분배된 것으로 구분되었다. 또한 수조권의 귀속처가 국가 기관인지 개인인지에 따라 해당 토지를 공전(公田)사전(私田)으로 분류하기도 하였다.

조선은 개국 이후 필요한 재정을 충당하도록 각 관서별로 토지를 분배해 주고 해당 토지의 수조권을 행사하도록 허용하였다. 이렇게 지급된 토지를 위전(位田)이라고 불렀고, 위전에 기초한 수조권 행사 방식을 각사위전제(各司位田制)라 하였다. 위전의 소출에 따른 전세는 소속 관서에 납입되었는데, 납입 액수는 풍흉에 따라 수확량을 결정하는 답험손실법에 따라 해마다 달라졌다. 이후 국용전제(國用田制)의 시행으로 관서의 위전이 대부분 혁파되고 호조(戶曹)를 통해 재원을 분배받는 방식으로 변하였다. 이에 따라 수조권 분배에 의한 재정 운영이 상당 부분 폐지되었다. 그러나 일부 관서들과 지방에 위치한 국가기관은 계속해서 위전을 운영하여 재원을 조달 받았다.

한편 개인에게 수조권을 분배한 것은 과전법(科田法)이 대표적인 경우였다. 과전법은 전·현직 관원에게 관품에 따라 과전(科田)을 지급하여 전세를 거두도록 하는 제도였다. 조선의 과전은 경기도의 토지로만 분배하는 것이 원칙이었고, 수조액을 정하는 답험은 수조권을 가진 관원이 직접 시행하도록 하였다. 따라서 과전에서의 납입량은 보통 일반적인 토지보다 무거운 것이 일반적이었다. 세조대에는 과전법이 혁파되고 현직 관료에게만 토지를 지급하는 직전법(職田法)이 시행되었다(『세조실록』 12년 8월 25일). 성종대에는 직전(職田)에서 세금 거두는 것을 국가가 대행한 후, 거둔 세금을 다시 관원들에게 나누어 주는 관수관급제(官收官給制)가 시행되었다(『성종실록』 1년 4월 20일).

수조권의 분배는 재정을 합리적으로 운영하기 위한 방법 중 하나였으나 여기에서 파생된 문제점도 적지 않았다. 우선, 수조권을 지닌 자들이 온갖 부정 비리를 저지를 위험이 많았고 그에 따라 농민의 부담이 늘어날 가능성이 높았다. 또한 국가의 관리 감독이 제대로 시행되지 못할 경우 불법적으로 수조권을 행사할 가능성도 많았다. 사전(私田)의 폐해가 고려 멸망의 주요 원인 중 하나라는 사실은 수조권 분배가 지니는 제도적인 약점을 단적으로 보여 주는 것이었다.

변천

관서별로 수조권을 분배하여 재정을 운영하게 하거나, 관원에게 수조권을 부여하여 경제적 처우를 대신하는 제도는 15세기 후반부터 점차 사라지기 시작하였다. 세종대 기획된 국용전제가 15세기 후반부터 본격적으로 가동되기 시작하면서 각 관서에 대한 수조권 분배가 대부분 혁파되었다. 한편 명종대 이후 직전법도 더 이상 기능하지 않게 되자 개인에 대한 수조권 분배 역시 크게 위축되었다.

그러나 조선후기에 들어서 왕실 구성원의 궁방전(宮房田), 각 아문 소속의 둔전(屯田) 등이 증가하면서 수조권 분배에 의한 토지지배가 다시 대두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궁방전과 둔전은 원칙적으로 정부에서 소유권을 지급받아 설정된 것들이지만, 많은 경우 본래 소유주가 있는 토지 위에 불법적으로 설정된 것이었다. 그 결과 본래 국가로 귀속되어야 할 세액을 궁방이나 아문이 차지하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 때문에 당시 관료들도 궁방전과 둔전을 조선전기의 직전(職田)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하였다. 지주전호제(地主佃戶制)가 발달하였던 조선후기에도 이런 방식을 통해서 수조권에 의한 토지지배가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속대전(續大典)』
  • 『대전회통(大典會通)』
  • 강제훈, 『조선 초기 전세 제도 연구: 답험법에서 공법 세제로의 전환』,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2002.
  • 이재룡, 『조선 전기 경제 구조 연구』, 숭실대학교 출판부, 1999.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