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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2:29 기준 최신판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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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상지관 |
한글표제 | 상지관 |
한자표제 | 相地官 |
동의어 | 상지자(相地者), 풍수학인(風水學人) |
관련어 | 용사(庸師), 장사(葬師) |
분야 | 생활·풍속/풍수 |
유형 | 개념용어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 |
집필자 | 김두규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상지관(相地官)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세종실록』 23년 8월 28일 |
조선시대 관상감(觀象監)에 소속되었던 풍수지리 전문직 관원.
개설
궁궐터, 능, 태실 등의 입지 선정을 담당하는 전문기술직 관원으로서 상지관은 그 역사가 아주 길다. 공식적으로 고려시대부터 풍수 전문가를 관료로 선발하였으며, 조선시대에도 서운관(書雲觀)과 관상감에 풍수 관료를 선발·배치하였다. 따라서 상지관은 일정한 수준의 풍수 공부를 한 뒤 요구되는 시험에 합격한 관리였다. 그러한 까닭에 땅[地]을 보는[相] 관리[官]라는 뜻의 상지관이란 명칭을 갖게 된 것이다.
내용 및 특징
조선시대 풍수 전문 관료인 상지관은 서운관과 관상감에 소속되어 땅을 보는 일을 담당하였다. 1392년(태조 1) 서운관이란 관제를 두어 천문, 역일(曆日), 지리 등의 일을 맡게 하다가, 1466년(세조 12) 개칭된 관상감에 소속시켰다. 관상감의 총책임자 관상감은 영의정이 겸직하고 그 아래 일정 직제를 두어 천문, 지리, 기상을 담당하게 하였다.
상지관은 일정한 시험을 거쳐 선발되었는데, 조선초기인 1392년(태조 1)부터 음양과(陰陽科)에 규정된 과목을 과시(科試)를 통해서 선발되었다. 음양과에는 지리학, 천문학, 명과학(命課學)이 포함되었다. 조선시대에 상지관이 되기 위해서는 고도의 전문지식을 갖추어야 했다. 이것이 정식 시험을 통해 상지관이 되는 길이었으나, 특별한 경우에 시험을 치르지 않고도 상지관이 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궁궐 조성이나 능묘 선정 과정에서 실력이 있다고 소문난 풍수 전문가들을 왕이 직접 임시직으로 임명하여 입지 선정에 관여하게도 했다. 이 경우에는 신분이 반드시 중인 계층에 한정되지 않고 전·현직 관리, 승려, 재야에 숨어 사는 방외지사, 심지어 노비가 상지관 역할을 하기도 하지만 그들의 역할은 한시적이었다. 그러나 조선시대 내내 능묘 선정과 관련된 풍수지리 업무는 삼정승의 책임과 관리·감독하에 실행된 만큼, 매우 중시되었다고 할 수 있다.
상지관은 본래 잡과(雜科) 소속이었다. 일종의 기술직이자 중인 신분들이었기 때문에 전문지식 면에서는 양반 출신 관료들에 뒤지지 않았으나 차별 대우를 받아야 했다. 지리학교수가 종6품이었고, 지리학훈도가 정9품이었다. 더욱이 이들에게는 직전(職田) 없이 녹봉(祿俸)만이 주어졌기에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한 까닭에 부업으로 사대부들의 터 잡기에 관여하거나, 특정 실력자에게 은밀히 줄을 대려는 행태가 나타나기도 한다.
이와 같이 상지관들의 지위가 낮았으나 조선 시대 내내 그러한 것은 아니었다. 조선초기 새로운 도읍지를 찾거나 한양 천도 후에 왕릉 선정 등 상지관의 업무가 많았을 때에는 상지관의 품계가 1품에 이르기도 하였다. 그러나 조선후기에 상지관의 업무가 단순히 왕과 왕비가 죽었을 때 능묘 자리 찾는 일로 축소되면서 그들의 품계 역시 현격하게 떨어지게 된다.
조선초기 상지관 가운데 이양달(李陽達)은 고려시대부터 상지관으로 활동한 인물이다. 조선 개국과 더불어 도읍지 선정에 관여하는 등 지대한 공헌을 하여 세종에 의해 정1품직에 오르기까지 한다. 풍수 전문 관료로서 정1품에 오른 경우는 이양달이 유일하다. 안효례(安孝禮) 또한 세조의 왕위 찬탈과 능묘 자리 선정 등에 기여하여 당상관의 벼슬에 오른다. 이 밖에 조선 개국 초 윤신달(尹莘達), 유한우(劉旱雨), 고중안(高仲安), 문맹검(文孟儉) 등은 조선 건국과 한양 도읍지 조설에 적지 않은 기여를 하게 된다. 특이한 경우는 관청 소속의 노비가 상지관이 된 경우인데 세종 당시 전농시 소속의 목효지(睦孝智)가 그 대표적 예이다. 목효지는 단종의 친모 권씨의 능자리 소점과 관련하여 세종에게 풍수 상소를 올려 노비에서 면천됨과 동시에 상지관이 된다(『세종실록』 23년 8월 28일). 임진왜란 전후하여 활동하였던 남사고(南師古), 박상의(朴尙義), 이의신(李義臣) 등도 지금까지 풍수사에서 자주 언급되는 유명 풍수가들인데 모두 상지관 출신들이다.
변천
상지라는 말은 용도에 알맞은 땅을 본다는 뜻이다. 우리나라에서 상지관은 고려시대에는 일관(日官)이었는데, 일관의 전신은 일자(日者)이다. 고려시대 일관이 천문, 지리, 역수(曆數), 기상 등 모든 것을 담당하였다면, 조선시대에 상지관은 그 가운데 지리만을 담당하는 것으로 그 역할이 한정된다. 상지관은 줄여서 지관이라고도 불리었고, 풍수학인, 상지자(相地者) 등이 혼용되어 조선후기까지 사용된다.
가끔 용사(庸師), 장사(葬師) 등이 상지관을 의미하는 것으로 『조선왕조실록』에 언급된다. 대개 풍수를 폄하하여 발언할 때 쓰이는 용어이다. 지관, 지사 등의 용어가 조선후기 이후 지금까지 사용되지만, 이는 풍수 전문 관료로서가 아니고 단순히 상대방을 높게 부르는 호칭일 뿐이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경국대전(經國大典)』
- 『사기(史記)』
- 『시경(詩經)』
- 김두규, 『조선 풍수학인의 생애와 논쟁』, 궁리출판사, 2000.
- 김혜정, 『중국 고전의 풍수지리 사상』, ㈜한국학술정보, 2008.
- 이몽일, 『한국풍수사상사』, 일지사, 1991.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