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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2:27 기준 최신판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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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사발통문 |
한글표제 | 사발통문 |
한자표제 | 沙鉢通文 |
관련어 | 사발통문(四發通文), 사발통문(肆發通文), 통문(通文), 경통(敬通) |
분야 | 정치/언로용어 |
유형 | 개념용어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말기, 대한제국 |
집필자 | 조재곤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사발통문(沙鉢通文)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순조실록』 22년 3월 20일 |
주도자를 모르도록 참가자의 명단을 둘러가며 적거나 문서를 적은 통문.
개설
일반적으로 사발통문(沙鉢通文)은 사발을 엎어 그린 격문(檄文)이나 호소문 등 고지문(告知文)을 가리킨다. 조선조 말 1860년대에 성행했던 민중 집단 시위 농성은 예외 없이 통문(通文)을 주요 공시 수단으로 이용하였다. 통문의 주요 내용은 총동원령이나 의식 절차를 고지하는 내용이었다. 통문은 시위를 위한 모임을 널리 알리거나 권유한 필사지(筆寫紙)였다.
내용 및 특징
원래 통문은 서원과 향교의 유림들이 자신들의 의사를 관철시키기 위해 사용한 공시 관행이었다. 이들의 통문은 일반적으로 ‘유통(儒通)’이라고 불렀다. 조선말에 들어서면 이에 영향을 받은 피지배계급의 통문이 출현하기 시작하였다. 일반적으로 서명자를 병기하여 발행하는 서류를 통문이라 하였는데, 사발통문은 일종의 통문이지만 이와는 다른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1822년(순조 22) 사간원에 보고된 기사에서 ‘사발통문’이라는 표기가 처음 보이는데(『순조실록』 22년 3월 20일) 이 말은 정통 유림의 범주를 벗어난 ‘사특한 통문’이라는 뜻이다.
고종대에 들어와서 민중 저항이나 대정부 항쟁에 사발통문과 같은 형식의 격문(檄文)이 성행하였다. 그 대표적인 예가 동학농민군의 사발통문이다. 1893년 12월 고부민란(古阜民亂) 시 등장한 사발통문은 주모자가 드러나지 않도록 둥근 사발(주발)을 엎어 놓은 원 테두리 밖에 참가자의 명단을 잇달아 쓴 것이다. 이 사발통문은 1968년 12월 4일 전라북도 고부군 서부면 죽산리(현 전라북도 정읍군 고부면 신중리 주산마을) 송준섭(宋俊燮)의 집 마루 밑에서 발견되었는데, 농민군 지도자 전봉준(全琫準)을 비롯한 20명의 서명자 명단이 한자와 한글로 적혀 있다. 그 내용은 죽산리송두호(宋斗浩)의 집에 모여 고부성을 격파하고 군수 이하 악리(惡吏)들을 제거 후 전주감영을 함락시키고 서울[京師]로 직향(直向)할 것을 결의한 것이다.
한편 보부상(褓負商)들이 발행하는 통문은 ‘사발통문(沙鉢通文)’ 혹은 ‘사발통문(四發通文)’이라 불렸는데, 이 중 후자는 ‘널리 전달한다’는 뜻을 포함하고 있었다. 보부상들이 상단(商團)의 이해를 집단적으로 관철시키기 위한 방식의 하나는 사발통문(沙鉢通文)의 발행이었다. 1879년의 『한성부 완문』에 따르면 사발통문의 근거로 "각 도 각 읍의 임소 중에 큰 일이 있으면 도접장이 있는 지역으로 달려가 보고하되 서로 번갈아 가며 전하여 임소를 경유하는 바, 밤낮으로 달리고 통하여 지체하지 않고 기한을 어기는 일이 없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사발통문의 전달 방식은 오늘날의 역전경주(驛傳競走)와 같은 방식이었던 것이다.
이들이 사발통문을 놓는 경우는 ① 국역(國役)이나 전쟁과 같은 국가에 큰 일이 있을 때 보부상에게 역(役)을 담당하도록 하기 위해, ② 큰 산송(山訟)이 일어나 시비가 되는 때, ③ 보부상이 아내를 잃어버렸을 때, ④ 시장에서 부상(負商)과 보상(褓商) 간에 시비가 일어났을 때, ⑤ 보부상과 관청 또는 일반 대중과 시비가 있을 때 등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통문을 발행하는 데 드는 비용은 적게는 수천 냥에서부터 많으면 수십만 냥에 이르기까지 다양하였다. 이때의 비용은 사발통문 발행처에서 부담하였다.
1900년 12월 상무지사 공사원김기하는 평안도 함종군수이병수가 보부상을 억압하는 데 불만을 품고 함종의 부상 이창보와 더불어 용강군에서 사발통문을 돌렸다. 그는 대동강 입구인 삼화항증남포에서 모집한 수만 명의 무리를 거느리고 전선을 절단하는 한편, 관공서 등에 불을 지르고 옥에 갇혀 있던 사람들을 풀어 주었다.
1903년 러일전쟁 직전 충청도 면천 지역의 보부상들은 사주(私鑄) 백동화(白銅貨)를 소지하고 있던 일본 상인과 결제 과정에서 분쟁이 있었다. 그 과정에서 보부상들이 이의 수령을 거부하자 일본 상인들은 다시 일본 제일은행권을 제시하였고 그 결과 양자 간에 싸움이 벌어졌다. 일본 상인이 쏜 총에 보부상 8명이 살해되고, 보부상들은 각처에 사발통문을 돌려 면천에 집결하여 이에 대응하고자 하였다.
이처럼 조선조 후기에 통용되던 사발통문은 손으로 전달하는 방법에 의존하는, 사용 주체나 내용 목적에 따라 서로 달리 표기된 공시 수단이었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관보(官報)』
- 조재곤, 『보부상: 근대 격변기의 상인』, 서울대학교출판부, 2003.
- 김용덕, 「격문을 통해서 본 전봉준의 혁명 사상」, 『나라사랑』15, 1974.
- 박영학, 「19세기의 동학통문 연구」, 『한국언론학보』32,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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