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부상(褓負商)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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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보부상 |
한글표제 | 보부상 |
한자표제 | 褓負商 |
상위어 | 행상(行商) |
하위어 | 대방(大房), 도접장(都接長), 반수(班首), 보상(褓商), 부상(負商), 황아장수 |
동의어 | 부보상(負褓商), 상려(商旅) |
관련어 | 객상(客商), 공원(公員), 백달원(白達元), 보부상단(褓負商團), 보부상유품(褓負商遺品), 보부청(褓負廳), 보상객주(褓商客主), 부상객주(負商客主), 험표(驗標), 혜상공국(惠商公局), |
분야 | 경제/산업/상업·무역 |
유형 | 집단·기구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시대 |
왕대 | 철종, 고종 |
집필자 | 김순주 |
폐지 시기 | 일제강점기 초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보부상(褓負商) |
봇짐이나 등짐을 지고 방문 판매를 주로 하던 행상 집단.
개설
보부상(褓負商)이란 보상(褓商)과 부상(負商)을 합친 말인데 보상을 ‘봇짐장수’, 부상을 ‘등짐장수’라고 부른다. 보부상이라는 용어가 문헌에 등장한 것은 조선말기인 19세기 후반경이다. 보상이나 부상이란 용어 역시 19세기 이전으로 올라가지 않는다. 『혜상공국서』와 『한성부완문』 등 보부상 관련 문서를 보면 이들의 역사가 상고시대까지 올라간다고도 하였고, 이성계(李成桂)가 위화도 회군을 할 때 토산 사람 백달원(白達元)이 부하 800여 명의 보부상을 거느리고 와서 군량미를 운반했는데 조선이 성립한 후 태조이성계가 그들의 공로를 기억하고 행상권을 그들에게 전담시켰다고도 주장한다. 또한 임진왜란 때나 병자호란 때도 이들이 전쟁을 적극 수행하여 난이 평정된 후에 그 공을 인정받았다고도 하였다.
그러나 이들의 주장과는 달리 보부상 조직이 언제 그 체제를 갖추게 되었는지는 문헌적 근거가 남아 있지 않아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렇다고 그러한 존재가 없었다는 것은 아니다. 단지 이들 특히 부상의 조직화는 조선후기 상업 발달과 관련지어 볼 때 장시가 전국적으로 형성되기 시작한 17세기 이후일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이들이 남긴 유품으로만 보면 1845년 이후 군현 수령이 상고(商賈)에게 발급한 공원차정첩(公員差定帖)과 1851년에 작성된 『예산임방입의절목』이나 원홍주육군상무사(元洪州六郡商務社)의 『청금록』이 가장 오래된 것이어서 이전의 역사에 대해서는 달리 고증할 길이 없다.
보부상들의 공식적인 의례 행사에는 한식날 제사와 공문제 축제가 있다. 이들은 장을 처음 열 때도 공문제 축제와 같은 형식의 놀이를 담은 ‘난장’을 벌였는데, 그 이유는 이를 통해 많은 사람을 모을 수 있고 따라서 시장을 활성화할 수 있는 방법이 되었기 때문이다. 보부상의 휴대품으로는 축작대 외에 골패(骨牌)와 체장[帖張] 등이 있고 특히 보상의 경우는 놋자[鍮尺]를 가지고 다녔다. 체장은 보부상의 소속을 증명해 주는 증명서 같은 것이다.
조직 및 담당 직무
원홍주육군상무사 보부상 조직의 명단인 『청금록』에 의하면 1851년 당시 대흥에 사는 임인손(林仁孫)이 당년 4월에 조령(朝令)을 받아 접장에 피선되었다고 하였다. 즉 그때 이미 부상들은 다음과 같은 전국적인 조직망을 형성하고 활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o 1851년 당시 부상 조직
중앙 : 팔도도공사장-충청좌우도 도접장-도본방-대방
지방 : 반수(班首)-접장(接長)-본방(本房)-도수공원-공사원
하위 : (장 단위) 대방-비방(俾房)-집사
같은 해에 작성된 『예산임방입의절목』은 비단 예산 지역뿐만 아니라 임방조직이 있는 전국의 군현 어디에나 내려졌던 완문이다. 그 안에는 잘못을 행한 자에게 내리는 14가지 벌목(罰目)을 적어놓았는데 주로 조직원 간의 단결과 타인에 대한 예의와 배려, 그리고 시장의 질서 등을 강조하고 있는 바 이는 이들 스스로가 정부로부터 사회 불안적 존재가 아님을 인정받기 위한 노력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예산임방입의절목』에는 조직의 허가 및 관리에 관한 관문서인 『한성부완문』이 붙어 있는데, 이는 정부가 이들 조직을 처음 공식적으로 인정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즉 당시 이들 공식 조직의 기본 단위는 임방이었다.
이때 상무사 본사는 서울 평시서 자리에 설치하고 사장-구관사장(句管社長)-부사장-사무장-부사무(副事務) 3명 등 간무(幹務) 인원을 두었으며 기타 세칙은 사장과 농상공부대신이 상의하여 정하도록 하였다. 각 도 관찰사가 분사장(分社長)이 되어 관할하는 지방 상무사 임원 조직은 영위(領位)-반수-접장-부접장-본방-공사장-명사장(明査長)-도공원(都公員)-별공원(別公員)-비대방(俾大房)-비방으로 구성되었다. 여기서 영위는 원로가 추대되는 명예직이고 실질적인 조직 운영은 반수와 접장이 맡았다.
변천
부상 조직과 보상 조직은 각기 별개의 조직으로 성장해왔다. 이 둘이 하나로 묶이는 계기는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집정하에 마련되었다. 즉 1866년에 정부에서는 각 군현에 상단 조직으로 보부청을 설치하였다. 그 배경을 보면 그해 병인양요, 즉 프랑스 함대가 조선을 침입하였을 때 보상과 부상이 흥선대원군의 명에 따라 상병단(商兵團)을 조직하여 강화도에 군량을 운반하고 문수산 전투와 정족산 전투에서 공을 세우자 흥선대원군은 보부청을 세워 스스로 도반수(都班首)가 되고 장남인 이재면(李載冕)에게는 사무를 관할하게 한 것이다.
그러나 실질적인 조직 활동에 있어서는 여전히 두 집단이 별개로 움직였다. 1879년 7월에 작성된 『비변사완문』은 『한성부완문』과 마찬가지로 비변사에서 전국 군현의 부상청(負商廳)에 내린 완문으로, 이 문서를 통해 중앙정부기관으로서 혜상공국이 설치되는 1883년까지 지방 단위에서 보상 조직과 부상 조직이 청(廳)을 달리하여 운영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
보부청은 1882년에 흥선대원군 정치에 반발한 민영익(閔泳翊)이 보부상들을 동원하여 흥인문 즉 동대문 앞에서 시위를 한 사건이 발단이 되어 삼군부에 소속시켜 감시를 받았으며 군대 편성에서 제외되었다. 1883년(고종 20) 8월 19일에 혜상공국이 중앙에 설치되었고 보상청과 부상청의 두 조직이 합해졌으며 혁파된 삼군부를 대신하여 군국아문에 부속되었다.
2년간의 혜상공국 시절을 거친 후 1885년 8월 10일부터 약 10년간 유지된 보부상 전국 조직이 상리국(商理局)이다. 이 시절에 지방에서 운영되던 보부상 조직을 보면 상위 조직에 영좌(領位)-반수-접장을, 하위 조직에 본방-문서공원(文書公員)-공사공원-도수공원-별공원 등을 두고 운영하였다.
상리국은 1895년(고종 32) 3월 4일에 폐지되었다. 당시 농상대신 엄세영(嚴世永)이 제의하기를 “지난해 7월 이후 상리국을 농상아문에 잠시 소속시켰으나 농상아문에 부서가 이미 있는 만큼 해당국은 없애버리며, 각 도의 임방도 일체 없애어 세를 거두어들이는 등의 폐단을 엄격히 금지하고 보부상들의 일을 편리한 대로 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하니 왕이 윤허하였다. 즉 이때 이미 보부상의 활동이 초창기와는 달리 정부의 이권에 도움이 되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상충되는 면이 있다고 판단한 것 같다.
보부상단은 2년 후인 1897년에 황국중앙총상회에 소속되었다가 7월에 황국협회를 만들어 독립협회 회원들을 무력으로 공격하여 해산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1899년부터 상무사로 바뀌면서도 부상과 보상은 별도의 조직을 가져 부상을 좌사(左社)로 보상을 우사(右社)로 불렀다. 이 당시 조직과 임원 명칭은 이후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계속 이어져왔다. 이로 인해 상무사는 보부상단을 대표하는 조직명이 되었다.
일본상인들의 침투 등으로 위축된 상업 활동을 권장하고 상로(商路)를 확장하기 위해 도시의 시전까지 합하여 조직한 상무사는 1903년에 부상과 보상을 따로 하여 공제소(共濟所)로 이관되었다가 상민회(商民會)로 옮겼고, 1904년 진명회(進明會)로 이속되었다가 다시 공진회로 소속되는 등 안정된 위치를 확보하지 못하다가 그해 2월 28일에 폐지되었다.
당시 의정부의정 이근명(李根命)이 제의하기를 “상무사를 설치한 것은 진정 상인들을 보호하자는 의도에서 출발한 것인데 최근 갖은 폐단이 늘어나 중앙과 지방에 해를 끼치기 때문에 백성들의 원한이 자자합니다. 이것을 그냥 둘 수 없으니 해당 관청을 우선 없애 치움으로써 각기 생업에 안착되게 할 것입니다. 이렇게 하였는데도 의연히 제멋대로 구는 폐단이 있을 것 같으면 각별히 단속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중앙에서의 위와 같은 변화에도 불구하고 지방에서는 임방 시절부터 뿌리를 내린 조직이 그대로 유지되다가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대부분 소멸되었다. 그러나 그중 충청도 지역에서 홍주를 중심으로 청양·오천·보령·광천·대흥 등 6개 군이 조직된 원홍주육군상무사와 예산과 덕산을 중심으로 당진 지역까지 포괄하는 예덕상무사(禮德商務社), 그리고 한산과 부여를 중심으로 정산·홍산·임천·서천·비인·남포 등 저산 8개 읍으로 조직된 저산팔구상무사(苧産八區商務社) 등이 남아 있고, 경상도 지역에서 고령과 창녕 등에서 조직을 유지하고 있다.
참고문헌
- 『비변사완문(備邊司完文)』
- 『한성부완문(漢城府完文)』
- 『보부상자료집』, 민속원, 1986.
- 유자후, 『조선부보상고』, 정음사, 1948.
- 정승모, 「유품을 통해 본 보부상단의 역사와 조직」, 『문화재대관 -중요민속자료-』,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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