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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2:25 기준 최신판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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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방룡 |
한글표제 | 방룡 |
한자표제 | 傍龍 |
관련어 | 내룡(來龍), 정룡(正龍) |
분야 | 생활·풍속/풍수 |
유형 | 개념용어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 |
집필자 | 김두규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방룡(傍龍)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세종실록』 27년 4월 4일 |
종조산(宗祖山) 혹은 주산(主山)에서 여러 산줄기가 뻗어 나갈 때 그 가운데 혈이 맺히는 중심 되는 산줄기인 정룡(正龍) 이외의 모든 곁줄기.
개설
방룡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풍수에서는 혈이 맺히지 않거나 맺히더라도 중심 되는 산줄기, 즉 정룡에 비해 현격하게 작은 혈이 맺히는 것을 뜻한다. 다른 한편 왕족 가운데 장자, 장손을 정룡이라 표현하고, 지손(支孫)을 방룡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이 두 가지 의미가 모두 사용되었다.
내용 및 특징
하나의 주산 아래에서 여러 산줄기가 뻗어 나갈 때 그 가운데 중심 되는 산줄기가 있고 곁줄기가 있다. 중심 되는 산줄기를 정룡이라 하고, 곁줄기를 방룡이라 한다. 정룡이 정기(正氣)를 받아 뻗어나가면서 곁줄기들의 호위를 받으면서 혈을 맺는다. 반면 방룡은 혈을 맺지 못하고 정룡을 보호해 주는 역할을 하거나 혈을 맺는다 하더라도 작은 혈을 맺을 뿐이다. 정룡은 내룡이 활동적이고 생기에 차 있어야 하며 과협이 잘 발달되어야 한다.
방룡을 정확하게 인식하고자 하는 이유는 방룡에는 혈이 맺히지 않기 때문이다. 자칫 혈이 맺힌다고 오인하여 그곳에 터를 잡으면 가혈(假穴)이 되어 재앙을 입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구 영릉 소점 당시에 발생한 방룡 논쟁이다. 세종은 훗날 자신이 죽으면 묻힐 무덤을 부왕인 태종 무덤 옆에 잡으려 하였다. 이때 일부 소수의견을 내던 풍수학인들이 대모산이라는 하나의 주산 아래, 즉 일국(一局) 내에 두 무덤을 쓸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 이유는 하나의 주산에서 두 개의 정룡이 뻗어 나올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세종실록』 27년 4월 4일). 비록 두 개의 산 능선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 가운데 하나는 정룡이고 다른 하나는 방룡이다. 이미 이곳에 태종의 무덤인 헌릉(獻陵)이 있다면 헌릉의 내룡이 정룡임에 틀림없다. 만약 세종의 수릉(壽陵) 자리가 정룡이라고 한다면 헌릉의 내룡은 방룡이 되어 헌릉은 잘못 터를 잡게 된다는 논리가 나올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결국 예종 때 지금의 경기도 여주로 이장하고 만다.
변천
방룡에 대한 용어는 조선조 지관 선발 고시과목에는 거의 나타나지 않고, 『장서(葬書)』에서 여러 용들이 있을 경우 그 가운데 특이한 것, 즉 큰 것들 가운데에서는 작은 용을, 작은 것들 가운데에서는 큰 용을 선택하라는 구별법이 나오는 것이 유일하다. 그러나 조선중기 이후 중국에서 유입된 풍수서에는 방룡에 대한 용어가 뚜렷하게 나타난다. 세종 당시 방룡에 대한 논쟁이 있었던 것은 세종의 수릉을 헌릉 옆에 소점한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함이었다.
참고문헌
- 김두규, 『조선 풍수학인의 생애와 논쟁』, 궁리출판사, 2000.
- 최창조 역주, 『청오경·금낭경』, 민음사, 1993.
- 徐善繼·徐善述, 『地理人子須知』, 臺灣, 竹林書局,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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