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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2:24 기준 최신판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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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무차대회 |
한글표제 | 무차대회 |
한자표제 | 無遮大會 |
관련어 | 수륙재(水陸齋), 진관사(津寬寺), 국행수륙재(國行水陸齋), 수륙전(水陸田), 보시회(普施會), 반승(飯僧), 회암사(檜巖寺), 무차선회(無遮禪會) |
분야 | 문화/종교/불교 |
유형 | 개념용어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 |
집필자 | 한상길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무차대회(無遮大會)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명종실록』 20년 4월 5일, 『태조실록』 4년 2월 24일 |
승속(僧俗)과 신분에 차별을 두지 않고 일반 대중을 대상으로 널리 법문을 베풀고 재물을 나누어 주는 법회.
개설
무차대회(無遮大會)는 고대 인도에서, 유아기를 벗어나 소년기에 접어들 무렵 유소년들에게 베푸는 통과 의례 가운데 하나였다. 이후 불교가 등장하여 고대 문화를 흡수하면서 유소년의 건강한 성장을 기원하고 공덕을 쌓는 의식으로 변화되었고, 보시회(普施會)나 반승(飯僧) 등의 개념으로 확대되었다. 그에 따라 왕과 관료 등이 시주가 되어, 승속·귀천·상하에 제한을 두지 않고 불보살에서 사람·아귀·축생·지옥중생에 이르기까지 모든 이에게 평등하게 베푸는 법회를 의미하게 되었다. 중국에서는 양(梁)나라 무제(武帝)가 동태사(同泰寺) 낙성식에 승속 50,000명을 모아 무차대회를 연 이래 여러 왕조에 걸쳐 성행하였다. 우리나라의 경우 고려초기인 940년(고려 태조 23)에 신흥사(新興寺) 공신당(功臣堂) 낙성식에서 열린 것을 시작으로 이후 자주 개최되었다.
무차대회는 다른 불교 의례와 달리 특정한 의례와 절차가 규정되어 있지는 않았다. 불교의 주요 덕목 가운데 하나인 보시의 정신을 실천하기 위해 차별 없이 모든 사람을 불러 모아 불법과 재물을 베푸는 데 뜻이 있었기 때문으로 짐작된다. 그런데 무차대회의 현실적인 개설 목적은 민심을 수습하는 데 있었다. 고려시대의 무차대회는 한결같이 왕 또는 국가가 주관하였다. 여기에 신분의 귀천 없이 수많은 백성을 참여시킴으로써 민심을 위무하는, 일종의 정치 행사처럼 진행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968년(고려 광종 19)에 귀법사에서는 무차수륙회(無遮水陸會)라는 이름으로 수륙재 형식의 무차대회가 열렸다. 수륙재는 물과 뭍에서 외로이 떠도는 모든 영혼들에게 평등하게 시식(施食)을 베풀어 영혼을 천도(薦度)하는 의식이다. 다른 말로는 수륙무차평등재의(水陸無遮平等齋儀)라고 하는데, 차별 없이 불법을 전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에 따라 무차대회는 수륙재와 그 성격이 유사한 까닭에 대개 수륙재의 의식 절차에 따라 진행되었다.
내용 및 특징
무차대회라는 명칭이 조선시대의 문헌에 등장하는 것은 단 한 차례뿐이다. 1563년(명종 18)에 순회세자가 세상을 떠나자, 2년 뒤인 1565년(명종 20) 문정왕후(文定王后)가 세자의 명복을 기원하는 대규모의 무차대회를 양주회암사(檜巖寺)에서 개최했다는 기록이 그것이다(『명종실록』 20년 4월 5일).
그러나 조선시대의 무차대회는 고려시대와 마찬가지로 수륙재의 이름과 형식으로 자주 개최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억불 정책을 시행했다는 사실이 무색할 만큼 수륙재가 많이 열렸다. 건국 초기인 1395년(태조 4)에 태조는 고려 왕족들의 명복을 빌기 위해 관음굴(觀音堀)과 견암사(見巖寺), 삼화사(三和寺)에서 수륙재를 베풀고, 매년 봄과 가을에 빠짐없이 거행하도록 하였다(『태조실록』 4년 2월 24일). 1397년(태조 6)에는 진관사(津寬寺)에 수륙사(水陸社)를 건립하여 국가의 수륙재를 상설화하였다. 나랏일에 목숨을 바친 신하와 백성들, 그리고 선조의 명복을 기원하고 중생을 이롭게 한다는 명분이었다. 수륙재는 불교의 영혼 천도 의식 중에서 가장 대중적인 법회였고, 대규모 의식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참여했기 때문에 공동체의 일체감을 불러일으키는 데 더할 나위 없는 효과를 가져왔다. 유학자 관료들의 반대가 있었지만, 사직과 종묘를 기린다는 명분을 막을 수는 없었다.
변천
중종대 이후 국가에서 주도하는 수륙재는 더 이상 설행되지 않았다. 그러나 사찰과 민간에서는 단절되지 않고, 본래의 목적인 영혼 천도뿐 아니라 장수, 질병 구제, 해운의 안전, 천재(天災) 퇴치 등 다양한 목적과 취지로 개최되었다. 그에 따라 무차대회가 지닌 평등의 의미는 사라졌지만, 수륙재는 불교 의식이라는 종교적인 차원을 넘어서 조선시대의 전통 문화와 풍속으로 자리매김해 나갔다.
오늘날에 들어와서는 1998년에 장성 백양사에서 무차선회(無遮禪會)라는 이름으로 개최되었고, 최근에도 대규모의 고승 법회, 대중 법회에서 무차대회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다.
참고문헌
- 고상현, 「고려시대 수륙재 연구」, 『선문화연구』10, 선리연구원, 2011.
- 김희준, 「조선전기 수륙재의 설행」, 『호서사학』30, 호서대학교 사학회, 2001.
- 심효섭, 「조선전기 수륙재의 설행과 의례」, 『동국사학』40, 동국대학교 사학과, 2004.
- 한상길, 「조선전기 수륙재 설행의 사회적 의미」, 『한국선학』23, 한국선학회, 2009.
- 한우근, 「세종조에 있어서의 대불교시책」, 『진단학보』26, 진단학회, 19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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