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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2:24 기준 최신판



서린 용이 여의주를 가지고 노는 형국이란 뜻으로 융릉(隆陵) 형국을 일컫는 말.

개설

풍수에서 땅을 보는 방법에 미시적 방법과 거시적 방법이 있다. 이 중 터 전체의 형국을 사물에 비유하는 거시적 방법론이 형국론이다. 반룡농주는 정조가 수원에 사도세자(思悼世子) 무덤을 천장할 때 그 터를 형국론으로 말한 것이다. 정조가 직접 붙인 명칭은 아니고 신라 말 풍수승 도선(道詵) 국사(國師)를 인용한 것이다.

내용 및 특징

풍수 형국론에서 어떤 지세를 용에 비유할 경우, 그 산 모양은 마치 거대한 용이 움직이는 듯한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 산을 오행으로 구분할 때 수성(水星)에 해당된다. 물론 수성을 기본으로 하는 것은 용말고도 뱀, 미꾸라지, 지렁이 그리고 각종 물고기 등이 있다. 그 근본 차이는 그 길이와 굵기 및 변화의 정도에 있다. 대개 용형에는 안산으로서 여의주나 강 혹은 샘이 있어야 좋은 명당으로 본다. 용 형상은 대체적으로 내룡(來龍)이 굵고 길어야 하며, 그 능선 앞에 여의주를 상징하는 구슬과 같은 작은 산이 안산으로 있어야 한다. 이때 이 여의주를 향해 내려오는 산 능선의 수에 따라 쌍룡, 오룡, 칠룡, 구룡의 이름이 붙여질 수 있으며, 그 용의 형상에 따라 다양하게 이름이 붙여질 수 있다. 용형의 유형에 따라 요구되는 안산과 정확한 혈처가 달라진다.

1789년(정조 13) 정조가 양주 배봉산에 있던 아버지 사도세자 무덤을 수원으로 옮기면서 새로 천장할 터를 두고 옥룡자(玉龍子) 즉 도선의 말을 빌려 반룡농주의 형국이라고 말하였다(『정조실록』 13년 7월 11일). 똬리를 튼 용이 여의주를 가지고 노는 형국을 이야기한 것은 몇 가지 이유가 있다. 그 가운데 하나는 그 터의 상서로움을 이야기하기 위함이다. 용은 상서로운 동물로 왕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동시에 용이 여의주를 가지고 놀 때 그 여의주의 위치나 방위에 따라 무덤의 위치나 방위를 정해야 하기 때문에 중요시될 수밖에 없었다.

변천

1659년(현종 즉위) 효종이 죽었을 때, 한때 효종의 사부이자 풍수에 능했던 윤선도(尹善道)가 효종의 능 자리 선정에 참여한다. 이때 윤선도는 현재의 수원의 융릉 터를 효종의 능지로 추천을 하면서 그 터의 형국을 반룡농주라고 표현하였다. 윤선도 자신이 반룡농주라고 이름 지은 것이 아니고 신라 말 도선 국사를 가탁하여 말한다. 그로부터 130년 후에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 묘의 천장지로 같은 곳을 결정하면서 다시 이 터를 반룡농주라고 불렀다.

참고문헌

  • 『고산유고(孤山遺稿)』
  • 김두규, 『조선 풍수학인의 생애와 논쟁』, 궁리출판사,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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