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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2:23 판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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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경률론소 |
한글표제 | 경률론소 |
한자표제 | 經律論疏 |
관련어 | 불교(佛敎), 결집(結集), 대장경(大藏經), 삼장(三藏), 일체경(一切經), 삼장법사(三藏法師) |
분야 | 문화/종교/불교 |
유형 | 개념용어 |
집필자 | 이종수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경률론소(經律論疏) |
경장·율장·논장의 삼장과, 삼장을 해석한 소를 아울러 이르는 말.
개설
경(經)은 부처가 설한 교법을 기록한 것을, 율(律)은 부처가 설한 내용 가운데 계율과 관련되는 것을 가리키며, 논(論)은 경과 율에 대한 후대 학자의 주장을 말한다. 경전을 모아 놓은 것을 경장(經藏)이라 하고, 율과 논을 모아 놓은 것을 각각 율장(律藏), 논장(論藏)이라고 한다. 이 셋을 합쳐서 삼장(三藏)이라 하는데, 흔히 대장경(大藏經)이라 부르기도 한다. 그리고 경·율·논을 이해하기 쉽게 자세히 풀어 놓은 것을 소(疏)라고 한다. 소는 불교가 중국에 전래된 뒤 경전을 이해하기 위해 해석하면서 만들어졌다.
내용 및 특징
경은 산스크리트어로는 ‘수트라(sūtra)’라고 한다. 수트라는 고대 인도에서 종교·학술·문학·법률 등 각 분야의 ‘권위 있는 책’이라는 뜻으로 사용한 말이다. 불교도들도 석가모니의 교설을 편찬한 뒤, 불교의 가장 권위 있는 책이라는 의미에서 수트라라는 명칭을 붙였다. 수트라는 원래 ‘실’ 또는 ‘끈’을 의미하는 말로, 석가모니의 가르침을 흩어지지 않게 꿰어 교법의 꽃다발을 만든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주로 산문으로 된 짤막한 금언이나 격언을 모은 것이다. 석가모니의 가르침을 기술한 문장의 전부를 경장이라 하는데, 여기서 장(藏)이란 ‘저장’의 의미이다. 경의 기본 형식은 "이와 같이 내가 들었다. 한 때에 붓다가 어디에서 누구에게 어떠한 말씀을 하였다."라는 구절로 시작하여, "이를 들은 이들이 모두 환희하여 예배하고 믿고 행하게 되었다."라는 구절로 끝나는 것으로 정형화되어 있다.
율은 불제자들이 지켜야 할 실제 생활상의 규정과 작법, 교단의 규약 등을 말하며, 이러한 계율을 모은 것을 율장이라고 한다. 경장과 율장은 대체로 석가모니가 입멸한 후 100년 사이에 성립되었다고 보고 있다.
이후 불교 교단은 경장과 율장을 전하면서, 교리를 연구하고 계율을 지키며 깨달음을 목표로 수행하였다. 그 결과 교리에 관한 연구나 해석이 발달하여 많은 저술들이 편찬되었으나, 이것들은 제자들이 지은 것이므로 경장과 율장에 포함시키지 못하고 따로 모아서 논장이라 불렀다.
그러므로 경율론 삼장에는 불교 문헌이 모두 포함된다. 삼장은 기원전 1세기경부터 문자화되었는데, 패엽(貝葉, pattra, [貝多羅])이라는 나뭇잎에 새겨 경장·율장·논장을 각각 세 개의 광주리에 담아 보관한 까닭에 삼장이라 불리게 되었다. 오늘날에는 모든 전적을 망라하고 있다는 뜻에서 일체경(一切經) 또는 대장경이라 부른다. 현재 해인사에 소장되어 있는 고려시대의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은 그 경판 수가 총 81,258장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또 법력이 높은 승려를 일컫는 삼장 법사라는 말도 경율론 삼장에 정통한 승려라는 뜻이다. 대장경은 팔리(pāli)어로 된 팔리어 대장경과 티베트어로 번역된 티베트 대장경, 그리고 한문으로 번역된 한역 대장경 등이 있다.
그에 비해 소는 경전이나 논서의 글을 이해하기 쉽도록 풀이한 글 또는 책을 말한다. 『화엄경소』·『원각경소』·『대승기신론소』 등이 대표적이다. 소를 더욱 자세히 풀이한 경우에는 ‘초(抄)’ 또는 ‘기(記)’라는 용어를 붙인다. 『화엄경소초』·『원각경소초』·『대승기신론소별기』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경전의 성립
석가모니가 쿠시나가라 사라쌍수(沙羅雙樹)에서 80년의 생을 마감하고 입멸한 뒤, 스승의 가르침이 후세에 전해지지 않을 것을 염려한 제자들은 한곳에 모여 각자가 기억하고 있는 가르침이 맞는지 암송하고 기억하였다. 불교에서는 이것을 결집(結集)이라고 표현하는데, 석가모니 입멸 후 400여 년 동안 네 차례의 결집이 있었다고 한다.
제1결집은 석가모니가 입멸한 직후 중인도 마가다국(摩伽陀國)의 수도인 왕사성(王舍城) 교외에 있는 칠엽굴(七葉窟)에서 행해졌다. 깨달음을 얻은 500명의 아라한(阿羅漢)이 모였는데, 석가모니의 상수(上首) 제자인 마하가섭(摩訶迦葉)이 의장이 되었다. 이때 석가모니의 시자로서 곁에서 설법을 가장 많이 들었던 아난(阿難)이 교법을 외웠으며, 우팔리(Upāli)가 율을 외웠다고 한다. 그런데 이때는 문자가 아직 상용되지 않았던 시대였으므로, 모인 제자들이 석가모니의 설법을 기억나는 대로 암송하여 내용을 검토하고 확인한 뒤 마지막으로 다시 함께 암송하였다. 이때의 결집을 통해 처음으로 불교의 경전이 성립하였다.
제2결집은 석가모니 입멸 100년 뒤에 아난의 제자 야사(耶舍)가 바이살리에서 700명의 비구를 소집하면서 이루어졌다. 그 당시 바이살리 지역의 비구들은 뿔로 만든 용기에 소금을 축적하거나 금은을 보시물로 받는 등의 십사(十事)를 행하고 있었는데, 이 관행을 계율에 어긋나는 행위로 규정하면서 비구들을 불러 모은 것이다. 이때의 결집에서 십사를 합법으로 보는 진보파와 위법으로 여기는 보수파 간의 갈등 때문에 부파가 발생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제3결집은 석가모니가 입멸한 지 200년이 지났을 무렵에 이루어졌다. 마가다국 아소카왕이 인도 전역을 통일하고 불교에 귀의하였는데, 승려들마다 불교에 대한 이해가 달라서 승가(僧家)가 혼란에 처해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당시 불교의 최고 권위자였던 목갈리풋타 팃사를 초청하였다. 목갈리풋타 팃사는 승가의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당시 수도였던 파탈리푸트라에 1,000명의 비구를 소집하여 논장(論藏)을 결집하였다. 제1차와 제2차 결집에서 경장과 율장이 정비되었고, 이때 논장이 정비되어 처음으로 경율론 삼장이 성립되었다.
제4결집은 『대비바사론(大毘婆娑論)』을 편집한 때를 말한다. 석가모니 입멸 400년 뒤에, 카니시카왕의 치하에서 파르슈바가 중심이 되어 500명의 비구를 소집해 『대비바사론』을 결집했다고 한다.
참고문헌
- 모치즈키 신코저, 김진렬 역, 『불교경전 성립의 연구』, 불교시대사, 1995.
- 미즈노 고겐 지음, 이미령 옮김, 『경전의 성립과 전개』, 시공사, 1996.
- 장휘옥, 『불교학개론강의실2』 교리편, 장승, 1995.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