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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2:22 기준 최신판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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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군적 |
한글표제 | 군적 |
한자표제 | 軍籍 |
상위어 | 군정(軍政), 군제(軍制) |
하위어 | 용모파기(容貌疤記), 장척(長尺) |
동의어 | 군목(軍目), 군안(軍案), 군적부(軍籍簿), 병적(兵籍) |
관련어 | 군액(軍額), 군역(軍役), 군적감고(軍籍監考), 군적경차관(軍籍敬差官), 군적도감(軍籍都監), 군적수포(軍籍收布), 군적청(軍籍廳), 백골징포(白骨徵布) |
분야 | 정치/행정/문서·행정용어 |
유형 | 개념용어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고려시대~조선시대 |
왕대 | 태조~순종 |
집필자 | 김성갑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군적(軍籍) |
고려 및 조선시대 군사 조직과 군역을 부담한 인원들에 대한 각종 정보를 기록한 장부.
개설
군적(軍籍)은 군안(軍案), 군목(軍目)이라고도 불리는 병적기록부이다. 현재 병역의 의무를 지고 입대를 하거나 혹은 직업 군인으로서 군사 조직에 속하게 되면 각각 소속된 병영에서 자신의 신상 명세에 대한 많은 정보가 기록, 관리되는데 이것이 바로 군적이다.
내용 및 특징
군적에는 각 속오군병의 신상에 해당하는 16가지 기본 사항이 기록되어 있다. 즉 배속 부대, 계급, 순번, 신분·직역, 성명, 나이[年], 소속 고을[係], 거주지[住], 얼굴 특징[面], 수염[髥], 신장[長: 尺·寸], 흉터[疤], 부친 성명[父], 주특기·기예[藝], 신원 보증인[族], 편입 연월[月入]이 기재되어 있다. 이 기재 양식은 지역에 따라 다양하게 변모하면서 나타나고 있다. 기재 내용에 대하여 현전하는 기록량이 가장 방대한 『충청도속오군적』(토지주택박물관 소장본)의 기재 사례를 들어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697년 우사좌초(右司左哨)의 1기총(旗摠)인 임유청(林有靑), 나이 43세, 충청도 석성(石城) 지역 부대, 병촌(幷村) 지방 거주, 얼굴은 마맛자국 조금 있음, 수염 약간, 신장 4자 3치, 흉터는 왼쪽 뺨, 부친 임끝생(林唜生), 주특기 포(砲), 신원보증인 임표선(林表先), 편입 연월 을해년(1695년) 3월.”
변천
고려시대의 군적은 현재 전해지지 않지만, 『고려사』에 전하는 바로는 고려시대에는 군인이 되는 대가로 국가가 지급하는 토지인 군인전을 지급받았고, 군인전을 통하여 자손이나 친족에게 군역이 세습되었다. 군적에는 이와 같이 군인전의 수수 관계와 군역 부담자에 대한 여러 정보를 기록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조선시대에 들어 6년에 한 번씩 『경국대전』상에 군적을 작성하도록 하고 외방의 경우 각도의 병마절도사들의 주관하에 작성하며, 관찰사는 도(道)의 감영과 주진(主鎭), 거진(巨鎭), 제진(諸鎭)에 한 건씩 보관하도록 했다. 조선전기에 주로 군목이라는 용어가 자주 쓰였고, 군적과 군안은 조선전기와 후기를 아우르는 경향을 보이고 있지만, 그 내용에 있어서 지칭하는 실체가 크게 구분되는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유성룡(柳成龍)이 명나라 군제를 수용하면서 설치한 속오군 체제에 대한 군적을 만들었는데, 이것이 현전하는 군적 중 가장 오래된 1596년(선조 29)의 『진관관병용모책』이다. 『진관관병편오책』과 함께 전해지는 이 군적에는 총 552명의 속오군 기록이 전해지고 있다. 여기에는 속오군 개인의 성명, 나이, 소속 부대, 주소, 신장, 얼굴 색깔, 수염 상태, 주특기 등을 기록하였다.
1679년(숙종 5)에 작성된 약 5,000명에 달하는 『충청도속오군적』에는 16가지의 다양하고 상세한 사항을 기록하였고, 1685년(숙종 11)에 작성된 『제주속오군적부』에는 소속 부대, 이름, 나이, 부친의 성명, 주소, 신장, 얼굴 색깔, 수염 상태, 흉터, 기예 등을 기록하였다. 이후에 작성된 조선후기의 군적들은 실질적인 군사 조련이나 부대 편성을 위한 기재라기보다는 군포 수납을 위한 형식적인 기재 양상을 보이게 되는데, 단편으로 남겨진 낱장의 군적들이 바로 그것이다.
의의
현전하고 있는 조선시대의 군적은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지방 방위 체제의 재정비를 위한 속오군 체제의 성립과 그 시작을 같이하고 있다. 다시 말해 속오군 체제는 일본의 침략으로 동래성이 함락되고 순식간에 북쪽의 국경선인 의주까지 후퇴하게 되면서 지방 방위군의 평시 훈련과 조직 관리에 대하여 극명한 필요성을 느낀 조선 조정의 결정에 의해 성립된 것이라고 하겠다.
유성룡의 발의에 의해 확립된 속오군 체제의 실질적이고 효율적인 관리와 훈련을 위해 작성된 것이 바로 군적, 그중에서도 현전하는 군적 가운데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속오군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시행 초기의 실질적 군적 기록 관리는 양대 전란 이후 국가에 큰 위기가 발생하지 않음에 따라 점점 수세 체계의 방편으로 전락해갔고, 따라서 형식적인 기록, 더 나아가서는 죽은 이들에게까지 군포를 과징하는 백골징포(白骨徵布)의 폐단으로 이어지게 된 것이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경국대전(經國大典)』
- 김우철, 『조선후기 지방군제사』, 경인문화사, 2000.
- 차문섭, 『조선시대 군제연구』, 단국대학교 출판부, 1973.
- 김성갑, 「숙종대 충청도 속오군적 소개」, 『문헌과 해석』 41,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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