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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2:18 기준 최신판



특정 목적을 위해 임시로 지은 시설물.

개설

가가(假家)는 임시 건물을 총칭하는 것으로, 건축과 철거가 쉽도록 초석이나 기와 등을 사용하지 않고 만든 건물을 말한다. 일반적으로 도로를 침범하여 상업적인 행위를 하는 난전 건물로 많이 알려졌다. 그러나 국가나 왕실에서도 일시적으로 공간을 조성하여 행사를 해야 할 경우나, 국가의 물품을 보관하기 위해 창고를 짓기 어려울 경우 일시적으로 가가를 이용하기도 하였다. 중국에서 사신이 오거나 왕실에서 대규모 잔치를 벌이는 등 궁궐 내에 행사가 있을 때면 일시적으로 많은 인원을 수용해야 했다. 겨울이 되면 이때 궁궐에 숙직하는 군사들이 비바람과 추위를 피할 수 있도록 가가를 조성하기도 하였다. 또 왕실에 국상이 발생할 경우 궁궐과 산릉에 가가를 조성하였는데, 이때 조성된 가가가 가장 크고 다양하였다.

산릉에서 국장(國葬)을 행하기 위해 조성하는 대부분의 건물은 가가의 형식이다. 왕이나 왕비 등의 관(棺)인 재궁(梓宮)을 임시 봉안하기 위해 마련하는 영악전(靈幄殿), 왕이나 왕비 등의 분묘(墳墓)인 능상(陵上) 위에 봉분을 조성하기 위해 마련하는 능상각(陵上閣)과 수도각(隧道閣)도 가가의 일종이다. 국장 의례에 참여하기 위해 대여(大輿)를 이끌고 산릉까지 따라온 문무백관 및 종친, 내관과 나인 등의 숙소도 가가로 만들었다. 국장 행렬에 갖추고 온 길흉 의장(儀仗)을 보관하기 위한 건물, 상례 기간 동안 제물을 준비하기 위해 마련하는 가재실 등도 가가의 형태로 조성되었다.

내용 및 특징

조선초기인 세종 연간에는 국가에서 백성을 구제하기 위해 가가를 조성하기도 했다. 세종은 농토를 잃고 방랑하는 백성들을 위해 주요 도로에 임시 건물을 짓고 음식을 나누어 주었다. 겨울이 되면 떠도는 백성들이 얼어 죽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가가를 지어 거처를 마련해 주기도 하였다. 이후 1469년(예종 1)과 1470년(성종 1)에는 궁문을 지키는 숙직 군사들이 머물 수 있도록 영추문 안에 가가를 짓기도 하였다(『예종실록』 1년 10월 6일).

연산군은 궁궐 안에서 잔치를 열 때 가가를 지어 공간을 확보하였다. 1504년(연산군 10) 6월 7일, 창경궁 인양전(仁陽殿)에서 왕후 족친의 잔치를 베풀 때 인양전 주변으로 가가를 지었다(『연산군일기』 10년 6월 7일). 다음 해에는 단오 진연을 위해 명륜당(明倫堂) 재실 안뜰에 자리를 베풀고 비가 올 것을 대비하여 가가를 지었다(『연산군일기』 11년 4월 5일). 1506년(연산군 12)에는 경복궁에서 산디놀음을 하는 곳에 가가를 지었는데, 누(樓)·방(房)과 온돌도 설치하였다.

조선후기에도 가가는 계속 만들어졌다. 광해군은 궁궐 영건에 사용하고 남은 목재를 보관하기 위해 인왕산 아래에 가가를 지었다. 그 외에 빈전을 정할 때 빈전 주변으로 가가를 설치하여 공간을 활용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가가로 인한 사건도 발생하였다. 1674년(숙종 즉위)에 인화문(仁和門) 내 가가에서 불이 나 인정전 처마까지 화재가 번진 사건이 있었다. 이는 선정전(宣政殿)에 빈전을 정하기 위해 그 주변으로 가가를 가설했기 때문이었다(『숙종실록』 즉위년 10월 21일). 1857년(철종 8)에도 밤 3경(三更)에 불이 빈전도감(殯殿都監)의 가가에서 일어나 선인문(宣仁門)과 동북소(東北所), 부장청(部將廳), 위장소(衛將所), 주자소(鑄字所)의 대청(大廳)과 판당(板堂)을 합하여 62칸에 번져 소실된 사례가 있었다(『철종실록』 8년 10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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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가의 특징은 그 조성법에 있다. 가가를 조성할 때는 땅의 다짐을 간결하게 하고 초석을 두지 않으며, 얇고 다듬지 않은 기둥을 땅에 박아서 세운다. 상부의 구조는 매우 간결하게 하여 갈대 등으로 성글게 덮고 그 위에 짚을 엮어 올려 초가를 형성한다. 예컨대 산릉에 가가를 조성할 때는 일시에 수백여 칸의 규모를 조성하기 때문에 공역과 재목을 줄이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그 방법으로 각 용도에 따라 구분되는 공간을 연접하게 건축하여 기둥과 벽체를 줄였다. 그러나 화재에 약한 목재와 불이 잘 붙는 짚으로 만들어진 가가를 연접해서 건축하였기 때문에 화재가 발생하면 불길이 확산되기도 하였다. 1600년(선조 33) 산릉에서, 나인이 있던 가가에서 불이 붙어 영악전까지 불길에 휩싸여 긴급히 재궁을 들고 나오는 사건이 있었다[『선조실록』 33년 12년 22일 6번째기사].

참고문헌

  • 『[효종]국장도감도청의궤([孝宗]國葬都監都廳儀軌)』
  • 신지혜, 「조선 숙종대 왕실 상장례 설행공간의 건축특성: 빈전·산릉·혼전을 대상으로」, 경기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0.
  • 우동선, 「가가(假家)에 관한 문헌연구」, 『대한건축학회논문집: 계획계』제19권 제8호,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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