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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2:10 기준 최신판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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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현릉 |
한글표제 | 현릉 |
한자표제 | 顯陵 |
상위어 | 왕릉(王陵) |
관련어 |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 소릉(昭陵) |
분야 | 왕실/왕실건축/능·원·묘 |
유형 | 능·원·묘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 |
집필자 | 김상협 |
장소 |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
좌향(坐向) | 계좌정향(癸坐丁向)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현릉(顯陵)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단종실록』 즉위년 9월 1일 |
조선 문종과 비 현덕왕후의 능.
개설
현릉은 문종과 현덕왕후(顯德王后)권씨(權氏)의 능으로, 왕릉과 왕후릉이 한 묘역 안에 있는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으로 조성되었다. 서쪽이 문종의 능이고, 동쪽이 현덕왕후의 능이다. 그런데 두 능은 처음부터 한 묘역에 조성된 것이 아니라, ‘소릉(昭陵)’이라 불리던 현덕왕후의 능을 1513년(중종 8)에 현릉 곁으로 천릉함에 따라 오늘날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조성 경위
현덕왕후는 화산부원군(花山府院君)권전(權專)의 딸이자, 단종의 어머니이다. 현덕왕후는 단종을 낳고 병을 얻어 1441년(세종 23) 문종보다 11년 먼저 승하하였고, 안산의 소릉(昭陵)에 묻혔다. 단종 복위사건에 의해 1457년(세조 3) 추폐되었다가 1512년(중종 7) 복위되어 다음 해 봄, 문종이 묻혀 있는 현릉으로 이장되었다.
그 뒤 약 10년이 지난 1452년(문종 2)에 문종이 승하하자, 묘호는 ‘문종’, 능호는 ‘현릉’이라 하였다. 처음에는 세종의 능인 영릉(英陵) 옆으로 산릉 터를 정하였다. 그러나 땅을 파는 과정에서 물이 솟아나, 건원릉(健元陵)과 가까운 곳으로 옮겨 능을 조성하였다.
조성 상황
문종의 능침에는 병풍석과 난간석을 설치하였으나, 현덕왕후의 능침에는 난간석만 두었다. 문종의 능은 『세종실록』「오례의(五禮儀)」에 따라 석실 현궁으로 조성된 왕릉이다(『단종실록』 즉위년 9월 1일). 『춘관통고(春官通考)』에 따르면 병풍석의 높이는 5척 5촌이었으며, 난간석은 12칸으로 난간 석주의 높이는 8척 2촌이었다. 또 장명등은 높이 12척에 둘레가 12척이었다.
능침 영역은 고려말기에 조성된 공민왕릉(恭愍王陵)과 마찬가지로, 상계(上階), 중계(中階), 하계(下階)의 세 부분으로 구분되었다. 공민왕릉 상계의 동서 길이는 40m이며, 북곡장의 길이는 41.4m로 상계의 동서 길이보다 길다. 중계의 길이는 5.7m이며, 너비는 상계보다 더 넓은 것으로 보이나 정확한 치수는 알 수 없다. 또한 중계에는 장명등 2개와 문인석 2쌍이 배치되어 있으며, 하계에는 좌·우·중앙에 각각 계단이 설치되어 있고, 좌우에 무인석이 놓여 있다.
『능원지(陵園誌)』에 따르면, 현릉은 문종이 안치되어 있는 능역과 현덕왕후가 안치된 능역으로 구분된다. 먼저 문종이 안치된 능으로부터 아래 80보 지점이자 현덕왕후의 능으로부터 아래로 105보 지점에 정자각이 조성되어 있었다. 정자각을 중심으로 서쪽 10보 거리에 수라청 2칸이 있으며, 동쪽 26보 지점에 수복방 3칸이 있었다. 또한 정자각 동쪽 33보 지점에는 길이 7척 5촌, 너비 2척, 두께 1척의 신도비가 세워져 있었다. 망료위는 정자각 북쪽 33보 거리에, 홍살문은 남쪽 113보 거리에 설치되었으며, 능역 내에 재실 36칸도 건립되어 있었다.
한편 『춘관통고』에 따르면 재실은 4칸 규모였으며, 그 동쪽에는 건원릉과 함께 사용하는 전사청 12칸이 있었다. 전사청 뒤에는 제기고가 있었고, 안향청은 8칸 규모였다. 또 홍살문은 정자각 남쪽으로 100보 거리에 있는 것으로 되어 있어, 『능원지』와 약간 차이가 있다. 연지는 따로 없으며 동구릉 외영역에 외연지가 있고, 현종의 능인 숭릉(崇陵) 앞에 연지가 있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변천
1441년(세종 23)에 현덕왕후가 세자빈의 신분으로 승하하자, 안산에 묘를 조성하여 안장하였다. 1450년에 문종이 즉위함에 따라, 현덕빈(顯德嬪)으로 불리던 현덕왕후는 왕후로 추존되었고, 그 묘는 소릉으로 격상되었다. 그런데 세조 연간에 단종(端宗)의 생모인 현덕왕후의 능이 본래 안산(安山)에 있었는데, 단종이 죽은 뒤 세조의 꿈에 현덕왕후가 나타나 아들 죽인 것을 책망하는 것을 보았다고 하여 그 능을 파서 물가로 이장(移葬)하였다.
이후 1512년(중종 7)에 대사헌남곤, 대사간조원기 등이 소릉과 현릉의 제사를 함께 지낼 것을 진언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듬해에 소릉의 천장이 논의되었고, 결국 문종의 현릉과 가까운 곳을 택하여 천장하였다. 그 뒤 소릉이라는 능호를 버리고 문종의 능과 합하여 현릉이라고 하였다.
현릉은 오늘날 동구릉의 하나로, 건원릉의 동쪽 능선 아래에 자리 잡고 있다. 능은 동구릉 좌측 아래에 문종의 능침이 있고, 반대쪽에 현덕왕후의 능침이 위치해 있다. 문종 능침의 좌향은 북쪽에서 남쪽을 향하는 계좌정향(癸坐丁向)이며, 현덕왕후의 능침은 동북쪽에서 남서쪽 향하는 인좌신향(寅坐申向)이다.
참고문헌
- 『국조상례보편(國朝喪禮補編)』
-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 『능원지(陵園誌)』
- 『선원보감(璿源寶鑑)』
- 『영릉보토소등록(英陵補土所謄錄)』
- 『주자가례(朱子家禮)』
- 『증보사례편람(增補四禮便覽)』
- 『춘관통고(春官通考)』
- 목을수, 『고려·조선능지』, 문성당, 1991.
- 은광준, 『조선왕릉석물지 상편』, 민속원, 1985.
- 은광준, 『조선왕릉석물지 하편』, 민속원, 1992.
- 김상협, 「조선 왕릉 석실 및 능상구조의 변천에 관한 연구」, 명지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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