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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조선시대에 제기(祭器) 공급을 주관하고 감독하던 임시 관청.

개설

고려 문종 때 처음 제기도감을 설치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유교 이념의 실천이라는 측면에서 제례 의식을 강조하여 종묘와 사직을 비롯한 왕실의 사당, 각 능의 제례 때 제기의 조달이 필요했다. 제기도감은 제례 의식에 필요한 각종 제기를 원활히 공급하기 위해 구성하였다. 『조선왕조실록』과 의궤의 기록을 보면 조선시대 제기도감은 성종·선조·광해군·인조대에 구성되었던 것으로 나타난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제기도감은 제기의 원활한 조달과 공급을 위해 설치되었다. 『고려사』「병지」에는 문종 때 제기 조달을 위해 제기도감을 설치한 것이 나타난다. 조선시대에는 『성종실록』에, 제기도감에서 예문에 의거하여 제기의 재료와 제기에 그린 그림 등을 설명한 내용(『성종실록』 21년 11월 22일)이 나타난다. 또한 “사직의 제기가 옛날 제도에 맞지 않으며, 정결하지 않고 깨지거나 훼손된 것이 있으면 고치게 하자”는 내용으로 보아 종묘와 사직의 제기를 예법에 맞게 조성하기 위해 제기도감을 설치했음을 알 수 있다.

선조대에는 1572년(선조 5)과 1601년(선조 34)에 설치하였다. 1606년(선조 39) 왜란으로 인해 종묘와 사직 등 국가 제사에 사용할 제기가 손실되어, 다시 제기를 조성하기 위해 제기도감을 설치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이때 제기를 조성한 경과를 정리하여 1605년(선조 38) 『사직종묘문묘제기도감의궤』를 편찬하였다.

광해군대에도 선조대의 전례를 이어 종묘와 영녕전 및 각 능에 사용할 제기를 제작하기 위하여 제기도감을 설치하였다. 1611년(광해군 3) 9월부터 1612년 11월까지 제기도감에서 제기를 제작한 과정은 『제기도감의궤』로 정리되었다.

인조대에는 인목대비의 41세를 기념하는 잔치를 염두에 두고 제기와 더불어 악기를 함께 제작하였다. 따라서 제기도감과 악기도감이 동시에 구성되었다. 1624년(인조 2) 3월부터 11월까지 제기·악기도감에서 제기와 악기를 비롯하여 제복(祭服) 등을 조성한 과정을 기록한 『제기악기도감의궤』를 편찬하였다.

조직 및 역할

고려시대에는 제기도감에 사(使) 2인을 두어 3품관이 겸하도록 하였으며, 부사(副使)는 6품관이 겸임하였다. 판관 6인, 기사(記事) 2인, 기관(記官) 2인, 서자(書者) 2인과 도감을 호위하는 간수군(看守軍) 2인을 배치했다.

조선시대 제기도감의 총책임자인 도제조는 정승급에서 임명하였으며, 제조 3명은 판서급에서 임명하였다. 1605년에 편찬된 『제기도감의궤』에 의하면 도제조는 좌의정기자헌, 제조는 유근·한효순·허잠 3명이었다. 실무 관리로는 도청과 낭청 등을 배치하였으며, 직접 제기를 제작하는 장인으로 구성되었다. 제기도감에서는 제기를 만드는 전 과정을 감독하였는데, 특히 제기의 용도·재료·크기·그림 등이 예문에 의거하여 적합한지를 살폈다.

1624년에 설치된 제기·악기도감은 일방(一房)·이방(二房)·삼방(三房)으로 나누어 업무 분장을 했다. 일방에서는 제기 및 주종(鑄鐘)에 관한 업무를, 이방에서는 제복 및 의장에 관한 업무를, 삼방에서는 악기 및 의장에 관한 일을 맡았다. 제기도감에서는 사섬시(司贍寺)·예빈시(禮賓寺)·장흥고(長興庫)·제용감(濟用監)·군기시(軍器寺)·의영고(義盈庫)·공조(工曹) 등의 관련 부서와 업무 협조를 하여 제기 조달을 총괄적으로 맡았다.

변천

고려시대 문종대에 처음 제기도감이 설치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조선왕조실록』에 성종 때 처음 제기도감에 관한 기록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성종대 문물과 제도를 정비하는 과정에서 제기도감이 본격적으로 구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유교적 예법을 구현하는 행위로서 제례 의식이 강조되었고, 의식에 사용되는 실물인 제기의 정확성에 대한 인식이 커진 것으로 보인다.

선조와 광해군은 임진왜란 때 훼손된 종묘와 영녕전, 각 능의 제기 마련이 시급함을 인식하고 제기도감을 설치하였다. 인조는 반정의 정당성을 널리 알리는 과정에서 인목대비의 존숭 작업에 매달렸고, 이 과정에서 인목대비의 잔치를 염두에 두고 악기도감을 구성하였다. 악기의 부족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제기가 부족한 것도 파악하였기 때문에 악기도감과 제기도감을 동시에 구성하였다.

인조대 이후에는 『조선왕조실록』에서 제기도감이라는 용어가 사라지고, 제기도감의궤가 따로 제작된 것도 없다. 이것으로 보아 제기도감을 별도로 설치하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조선후기에 작성된 『종묘의궤』를 보면 제기를 조달한 상황과 도설(圖說)이 있어 제기의 제작은 계속 이어진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사직종묘문묘제기도감의궤(社稷宗廟文廟祭器都監儀軌)』
  • 『제기도감의궤(祭器都監儀軌)』
  • 『제기악기도감의궤(祭器樂器都監儀軌)』
  •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국학진흥연구사업추진위원회 편, 『장서각 소장 의궤 해제』,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002.
  • 신병주, 「인조대 ‘풍정’ 의식의 추진과 관련 의궤 연구」, 『한국학보』제30권 제1호, 2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