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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에 설치되어 주로 환곡 운영과 관련되었던 민고.

개설

조선후기에는 국가의 부세 운영이 점차 각 군현별로 할당액을 부과하는 총액제 방식으로 바뀌었다. 이에 각 군현에서는 국가의 부세 체제에 대응하고 각 지방의 관용(官用) 비용을 조달하기 위하여 민고를 설치하였다. 즉, 민고는 국가에서 제도적으로 설치한 것이 아니라, 각 군현에서 지역의 관행에 따라 설립한 것이었다. 민고는 그 설립 목적에 따라 대동고(大同庫)(『숙종실록』 30년 6월 20일고마고(雇馬庫)(『정조실록』 1년 7월 16일)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렸는데, 보민청 역시 그러한 명칭 중 하나였다. 보민청은 주로 각 군현의 환곡 운영과 관련되어 설립되었으며, 지역에 따라 보민고(保民庫), 보민고(補民庫), 보민청(保民廳), 보민청(補民廳)이라고 불렸다.

설립 경위 및 목적

환곡은 본래 기민의 진휼을 위하여 설치되었다. 하지만 환곡의 곡식은 나누어 주고 돌려받는 과정 등에서 자연적으로 일정량이 손실되었고 그 양이 점차 국가 재정에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그러자 원곡(元穀)을 갚을 때 그 손실분에 해당하는 이자를 모곡(耗穀)이라는 이름으로 더 내게 하였다.

17세기부터는 모곡을 국가 재정의 일부로 사용하기 시작하였고, 18~19세기 들어서는 모곡이 국가와 지방의 주요한 재원으로 자리 잡았다. 즉, 진휼을 위하여 시행한 환곡이 부세적 성격으로 변모하였다. 그와 함께 환곡을 통해 재원을 마련하던 중앙의 각 아문과 군문, 지방의 군영은 원곡을 각 군현에 할당하고 거두어야 할 모곡의 할당량을 정해 주었다. 따라서 각 군현에서는 할당된 모곡만큼을 징수해야만 했고, 이것이 보민청을 창설한 원인이 되었다.

조직 및 담당 직무

보민청의 창설 주체와 운영 방식은 지역마다 달랐다. 기본적으로는 원곡을 확보하고 이를 근거로 식리 활동을 하여 이익이 발생하면 그 이익으로 환곡 모곡의 일부를 충당하였다. 보민청의 운영은 지역에 따라 백성이 주체가 되기도 하고, 수령이 주체가 되기도 하였다. 경우에 따라서는 수령이 주체가 된 보민청 일부는 대민 수탈의 도구로 활용되기도 하였다.

변천

갑오개혁으로 인하여 환곡제가 대폭 개편되면서, 환곡의 부세 기능은 결세(結稅)로 대체되었고, 진휼 기능은 사창제의 시행으로 보완되었다. 이에 따라 환곡의 모곡 납입을 위하여 설치되었던 보민청은 차츰 사라지게 되었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일성록(日省錄)』
  • 『여지도서(輿地圖書)』
  • 『만기요람(萬機要覽)』
  • 문용식, 『조선 후기 진정과 환곡 운영』, 경인문화사, 2001.
  • 정약용 저, 다산연구회 역주, 『(역주)목민심서 3』, 창작과비평사, 19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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