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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43년(중종 38)에 주세붕(周世鵬)이 건립한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

개설

소수서원은 1543년 풍기군수주세붕이 고려시대 유현인 안향(安珦)을 제향하기 위하여 설립한 서원이다. 처음의 명칭은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이었다. 건립 이듬해 안축(安軸)과 안보(安輔)를 연이어 제향하였고, 1633년(인조 11) 서원 건립자인 주세붕을 사묘에 제향하였다.

이후 풍기의 지방관으로 부임한 이황(李滉)이 주도하여 1550년(명종 5) ‘소수’라 사액(賜額)을 받아 조선시대 사액서원의 효시가 되었다. 중국에서 발흥한 서원 제도가 조선으로 도입된 후 처음 사액된 사례로서 이후 여러 서원들의 건립과 사액에 영향을 미쳤다. 이러한 위상으로 인해 1871년(고종 8)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훼철되지 않은 47개소 서원 중의 하나이다.

『조선왕조실록』에 수록된 소수서원 관련 기사는 14건이다. 내용을 살펴보면, 주세붕의 서원 건립과 이황의 사액 활동을 기록한 내용, 1550년(명종 5) 편액과 서책을 내린다는 기사, 서원 재정과 관련한 기록 2건, 그리고 서원 유생들의 공론 활동을 살필 수 있는 명종대의 승려 보우(普雨)를 논척하는 상소를 올렸다는 기록 등인데, 소수서원과 관련된 직접적인 기록들이다. 이와 함께 이후 건립되는 영천(永川)의 임고서원(臨皐書院)과 함양(咸陽)의 남계서원(濫溪書院) 등에 사액이 내려질 때 소수서원의 전례를 따랐다는 기록 등을 들 수 있다. 그리고 고종대 전국적인 서원 철폐가 단행될 때 존속한 7개소의 서원에 대한 기사를 마지막으로 하고 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백운동서원은 중종 연간 풍기군수였던 주세붕에 의해 창립되었다. 중국 남송(南宋) 때 크게 발전하기 시작한 서원은 교육 제도로서 역사상 큰 역할을 담당하였다. 중국의 서원에서 의리를 높이고 도학(道學)을 강론하여 많은 인재들이 배출되었다. 이로 인해 사문(斯文)의 흥기를 가져왔던 역사적 사실에 주목한 주세붕은 풍기의 지방관으로 내려가 서원 제도를 처음으로 도입한 것이었다.

서원의 건립 과정을 살펴보면, 주세붕은 1542년(중종 37) 안향의 사묘(祠廟)를 백운동 숙수사(宿水寺)의 옛터에 먼저 건립하고, 다음 해인 1543년 안향의 종가에 있던 유상(遺像)을 가져와 받들어 모셨으며, 이어 사묘 앞에 서원을 세웠다. 하지만, 주세붕의 이와 같은 서원 건립 활동은 여러 사람들의 조소와 비방을 받았다. 지방관으로서 국학인 향교(鄕校)가 있음에도 별도의 재정을 들여 서원을 건립한다고 한 사실을 보아 초기 서원 건립의 과정은 순탄치만은 않았던 듯하다.

건립 이후 서원의 경제적 기반을 확립한 인물은 안향의 후손 안현(安玹)이었다. 경상도관찰사로 부임한 그는 서원 재정의 마련을 위해 어염(魚鹽)을 확충하였고, 필요한 물자를 경상도 각 고을에서 거두어들여 경제적 기반을 충실히 하였다. 나아가 안현은 서원의 운영을 효율적으로 하기 위해 주세붕이 찬한 서원의 운영 방책을 보완하여 사문입의(斯文立議)를 마련하였다. 사문입의는 제례의 거행부터 서원에 소속된 노비와 원직(院直)의 보호, 학전(學田)과 미곡(米穀)의 운영, 어염의 수송, 장서(藏書)의 관리, 건물의 수리 등 서원의 운영과 유지에 필요한 방책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안현의 노력으로 교육 기관으로 기반을 갖춘 백운동서원이 명실상부하게 사림의 강학 장수처로 체제를 정비하게 된 때는 퇴계(退溪)이황(李滉)에 이르러서였다. 백운동서원은 건립 당시부터 안향을 제향하는 사묘의 부수적인 기구로 출발했고, 그 교육적 기능도 향교의 피폐상을 보완할 기능을 강조하여 과거(科擧)를 위한 과업의 수련장으로 인식되고 있었다. 이러한 점은 후일 이황에 의해 정립되는 도학(道學) 중심의 서원 운영과는 차이를 보이고 있었다.

1548년(명종 3) 10월 풍기군수로 부임한 이황은 주세붕이 건립한 백운동서원에 대한 사액을 요청하였다. 이황의 건의에 조정에서는 영의정이기(李芑), 좌의정심연원(沈連源), 우의정상진(尙震), 예조 판서윤개(尹漑), 예조 참의서고(徐固) 등이 적극적으로 서원 제도의 필요성을 주장하였다. 서원이라는 교육 제도는 중국 남송 때 주문공(朱文公)이 세운 백록동(白鹿洞)의 예를 따른 것으로 유생을 진작시키기에 좋은 방안이라고 평가하였고, 약간의 서적과 편액(扁額)을 내려주기를 청하였던 것이다(" title="이기 등이 풍기의 백운동 서원에 편액과 책을 내려 보낼 것을 아뢰다 『명종실록』 5년 2월 11일)[『명종실록』 5년 3월 15일].

이러한 중앙 정치 세력의 서원에 대한 우호적인 입장은 중종대 이후 유학을 장려하고 관학을 진작시키기 위한 노력이 별반 효과를 거두고 있지 못한 상황에서 인재 양성을 목적으로 하는 사설 교육 기관인 서원을 권장하는 것을 하나의 대안으로 인식하였기 때문이다. 이에 서원은 1550년(명종 5) 2월 ‘소수’라는 사액을 받고 조선시대 사액서원의 효시가 되었다.

소수서원의 사액은 성종대 이래 사림계가 중앙에 진출하면서 유향소(留鄕所)의 복립 운동, 사마소(司馬所)의 건립, 향약(鄕約) 실시 등을 통해 추진해 오던 향촌 사림의 기반 확보 시도가 처음으로 국가의 공식적인 승인을 받게 되었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이러한 측면에서 서원 제도는 이후 사림 세력의 정치 사회적 부상 과정에서 전국적으로 확산되게 되는 것이다.

조직 및 담당 직무

소수서원의 조직은 원장(院長)-유사(有司) 체제를 기본으로 하고 있었다. 서원의 일을 총괄하는 원장의 선출은 업문언신자(業文言愼者)를 선출한다는 원규(院規)가 제정된 이래 대체로 이 규정을 준수하고 있었다. 소수서원의 「원임안(院任案)」을 살피면, 원장의 경우 현직 관료는 많지 않고 대부분 생원, 진사, 참봉, 유학(幼學) 및 전직 하급 관료 출신 등으로 향내에서 명망 있는 인사가 선출되었다. 이와 같은 경향은 유사의 선출에도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서원의 조직은 이후 경상도 남인계 서원에서 일반적으로 통용되어 갔다.

서원의 재정은 초기 서원 건립기의 상황을 기록한 『조선왕조실록』 기사에서 부분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1541년(중종 36)에 기록된 사평에서 주세붕은 서원을 건립할 때 곡식 약간을 저축하였으며, 이를 간직하여 이자를 받아 서원의 경제 기반을 마련하려 하였고, 서원의 터를 닦으면서 얻은 구리 300여 근을 재정으로 삼아 서적을 갖추었다고 하였다(『중종실록』 36년 5월 22일). 또한 사액 여부를 조정에서 논의할 때 주세붕이 확보한 학전이 이미 부족하지 않다고 파악하고 있었다(『명종실록』 5년 2월 11일). 이러한 재정 기반은 경상감사로 부임한 안현에 이르러 더욱 충실해졌다고 알려져 있다.

실제 소수서원의 재정 규모는 1767년(영조 43)의 「전답안(田畓案)」을 참고할 수 있다. 여기에 따르면 소수서원의 소속 토지는 절대 다수가 서원 소재지 인근에 집중되어 있었고, 이외에 영천·안동 등지에도 분포하고 있다. 전답의 규모는 18세기 중반까지 약 19결 정도로 확대되었고, 다시 18세기 말에는 약 25결에 이를 정도로 상당한 규모였음을 알 수 있다.

서원 재정의 한 축을 담당하는 부분은 서원 노비이다. 노비들은 서원 내 각종 잡역 및 토지의 경작 등 생산 분야에 종사하거나 또는 신공(身貢) 납부의 경제적 의무가 있었다. 소수서원 건립 초기 노비의 확보는 관노비 또는 속공 노비의 획급 등 관의 조치가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지방관인 주세붕과 안현을 통한 관노비의 급속, 범죄인 처자의 압량위천(壓良爲賤) 등의 조치로 설립 초기에는 원직(院直) 6인(호), 노비 18구를 보유하고 있었다.

변천

소수서원은 최초의 사액서원으로 이후 조정에서는 여러 지역 서원의 사액 논의 과정에서 전례로 인용하였다. 1554년(명종 9) 영천의 임고서원의 사액, 1566년(명종 21) 함양의 남계서원에 편액을 내릴 때 이에 부수적인 서책과 노비 및 전답을 소수서원의 전례에 따랐다는 점이 이를 말해 주고 있다. 최초의 사액서원으로 체제를 정비하는 과정에서 소수서원은 몇 차례 분란을 겪었다. 그 첫째 사건은 1556년(명종 11) 서원에서 발생한 유생과 유사(有司)사이에 일어난 분쟁을 들 수 있다. 소수서원의 분쟁이란 당시 유사 김중문(金仲文)이 유생을 꾸짖어 욕보이고 구타하자 여기에 항의한 유생들이 서원을 비우고 귀가한 사건을 말한다. 김중문은 특별한 학행은 없으나 주세붕이 처음 서원을 창건할 당시 그를 도와 모든 일을 주선함으로써 공로를 인정받아 유사로 임명된 인물이었다. 이로 인해 그 이름이 조신(朝臣)들 사이에도 알려졌고, 특히 서원 제향 인물인 안향 후손들의 후대를 받고 있었다.

김중문은 안향 후손들의 후대를 믿고 평소 원유들에게 교만하게 임하여 그들의 반감을 샀으며 여기서 충돌이 일어난 것이었다. 충돌 직후 풍기군수한기(韓琦)는 김중문을 유사에서 물러나게 하였다. 이에 김중문은 인근 영천군수로 있는 안향의 후손이며 서원 관계로 왕래가 있던 안상(安瑺)에게 자신의 처지를 호소하였고, 안상이 그를 두둔함으로써 분쟁이 커지게 되어 거의 1년 가까이 서원이 황폐할 지경에 이르렀다.

이황은 당시 소수서원의 사태에 대해 지방관인 수령이 적극적으로 조정 역할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수령은 사림을 회유하고 서원에 다시 모여들도록 노력하여 유생 강학을 원활히 진행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초기 서원의 운영을 원활히 하기 위해서는 일정 부분 수령의 참여와 보호가 있어야 함을 강조한 것이다. 사태 해결 과정에서 나타난 이러한 이황의 입장은 이후 조선 서원의 전개 과정에서 관권(官權)과 향촌 자치적 성격을 지니는 서원의 관계를 규정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갈등을 거쳐 교육 기구로서 체제를 정비해 나갔던 소수서원은 17세기에 들어와 정치적으로 이황을 종주로 하는 남인(南人) 세력과 그 성향을 달리하고 있었다. 이러한 점은 사림계로부터 비난받았던 주세붕을 1632년(인조 10) 서원 제향의 반열에 올린 일에서 살필 수 있다. 주세붕은 소수서원의 전신인 백운동서원을 건립한 공로가 있는 인물이었지만, 그의 정치적 행적은 사림계로부터 비난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조선왕조실록』에 수록된 졸기를 살펴보면, 주세붕이 처음 벼슬에 나올 때 남곤(南袞)과 허자(許磁) 같은 공신 계열의 추천으로 홍문관에 임명되었고, 을사사화 당시에는 권신에 붙어 부제학에 올랐다. 또한 일찍이 사림의 배척을 받았던 이행(李荇)의 행장을 지어 과도하게 찬양한 일이 있었다(『명종실록』 9년 7월 2일). 이러한 주세붕의 처신에 대해 이황은 생전에 이미 그를 인정하지 않았고 백운동서원의 제향 건의를 반대한 바 있었다.

사림계로부터 부정적인 평가를 받았던 주세붕을 제향한 후 소수서원은 영남의 남인계와 정치적 성향을 달리해 나갔다. 예를 들어 인조대 이후 서인(西人)의 율곡(栗谷)이이(李珥)와 우계(牛溪)성혼(成渾)의 문묘 종사 요구에 대해 영남의 반대 여론에도 불구하고 이를 지지하고 나왔던 점, 이후 서원이 퇴계 학풍에 대해 비판적 성향을 보이며 서인 내지 노론 편향적 자세를 견지했던 사실 등에서 소수서원의 정치적 성향을 살필 수 있다.

의의

조선시대 최초의 사액서원이었던 소수서원은 그 중요성으로 인해 『조선왕조실록』에 건립과 사액에 이르는 기록이 비교적 자세하며, 서원에 소장된 고문적도 많이 현전하고 있다. 이를 통해 중국에서 유래한 서원 제도가 조선에서 정착해 나갔던 모습을 구체적으로 살필 수 있다. 또한 이황으로 대표되는 사림 계열의 서원에 대한 인식과 서원 운영의 실상을 파악할 수 있다.

참고문헌

  • 이수환, 『조선후기 서원연구』, 일조각, 2001.
  • 정만조, 『조선시대 서원연구』, 집문당, 1997.
  • 윤희면, 「백운동서원의 설립과 풍기사림」, 『진단학보』49, 1980.
  • 윤희면, 「소수서원 파격론쟁」, 『이기백선생고희기념 한국사학논총』하, 1994.
  • 『한국역사용어시소러스』, 국사편찬위원회, http://thesaurus.history.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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