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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1:45 기준 최신판



조선시대 함경도 갑산 지역에 설치된 진관.

개설

갑산진은 원래 고려의 영역 밖에 있었으나 고려 말에 편입되어 갑주라 불렸으며, 만호부가 설치되었다. 조선시대에도 계승되어 당시 이곳에 거주하던 다수의 여진인을 동화시키는 일에 박차를 가했다. 태종 때 방어력을 증강하고자 명칭을 갑산(甲山)으로 고치면서 만호 대신 지군사를 보냈다. 군익도에 편성되어 처음에는 길주도 좌익에 소속되었다. 진으로 삼은 뒤 익군을 주 병종으로 삼아 다른 병종까지도 그 편제에 망라하는 군익도체제를 확장할 때 독진으로 설정되었다. 진관 체제로 개편될 때에 그대로 유지되었다가 도호부로 승격되었다. 더불어 소속 진을 갖추어 『경국대전』에 수록되었다. 후기에 들어서 약간의 변화가 있었으나 그 골격은 유지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본래 허천부(虛川府)로 불렸다가 영내로 흡수되면서 1391년(고려 공양왕 3)에 갑주(甲州)로 바뀌고 만호부를 두었다. 조선 태조 때에 이르러 전부터 이 지역에 거주해온 많은 여진인들을 이두란(李豆闌)을 시켜 적극 동화시켜 온전한 영토로 만드는 한편, 두만강을 국경으로 삼도록 했다. 1398년(태조 7)에 정도전(鄭道傳)이 동북면의 군현을 정비할 때 지사(知事) 한 명과 함께 약간 명의 영사를 두도록 했으며 길주도에 소속시켰다. 왕자의 난으로 정권이 교체되어 정도전의 계획은 제대로 시행되지 못하고 다만 만호가 파견되었다.

1413년(태종 13)에 ‘주(州)’ 자가 붙은 군현 이름을 변경할 때 갑산으로 바뀌었다. 1415년에 이르러 만호를 고쳐 지군사로 삼았다. 때때로 갑산첨절제사로도 불린 것으로 미루어 보아, 행정에서는 지군사였지만 군익도(軍翼道) 체제에 편제되어 군사 분야의 일을 할 때에는 첨절제사로 활동한 것으로 보인다. 양계(兩界)를 함길도·평안도로 바꾼 뒤 세종 연간에 두 도의 군익도에 소속된 고을을 중·좌·우의 3익(翼)으로 나누어 편성하였다. 이때 갑산은 좌익에 소속되었다(『세종실록』 7년 2월 20일).

1434년(세종 16)에 비로소 다른 도의 연변 고을의 예에 따라 진(鎭)이라 불렸다(『세종실록』 16년 12월 2일). 또한 성을 쌓아 면모도 갖추었으나 여전히 길주도의 좌익에 소속되었다. 1455년(세조 1)에 함길도·평안도의 군익도체제를 전국으로 확장하면서 연해뿐만 아니라 내륙에도 거진을 두고 주변 고을을 분속시켰다. 이때 갑산진은 독진(獨鎭)으로 설정되었다(『세조실록』 1년 9월 11일). 이는 길주와 거리가 먼 데다가 여러 보(堡)를 거느렸기 때문으로 추측된다. 이후에도 계속 독립된 진영이었다. 1457년에 군익도체제를 진관제로 개편하면서 주요 지역을 거진으로 삼고 주변의 제진(諸鎭)을 휘하에 소속시켰다.

조직 및 역할

진관제로 개편할 때도 독진이었는데, 여전히 지군사가 절제사를 겸하게 함으로써 체제 운영에 문제가 되었다. 1461년(세조 7) 8월에 당시 함길도(현 함경도)도체찰사였던 한명회(韓明澮)가 갑산이 외적의 침입 통로로서 형세가 외롭고 군사는 약한데, 그 수령을 경험이 부족하고 계급이 낮은 자로써 임명하는 것은 적당하지 못하다고 주장했다. 한명회는 진을 설치하고 도호부로 승격시킬 것을 건의하여 이를 관철시켰다. 또한 갑산과 동인보 방어를 절제사에게 위임하여 검찰(檢察)하게 하고, 운총보(雲寵堡)에 따로 만호를 설치하여 단단히 방어할 것을 요청하여 허락받았다.

『경국대전』에서는 종3품인 도호부사가 병마첨절제사를 겸하여 진관을 통솔하되, 그에 소속된 운총에는 종4품 병마만호(兵馬萬戶)를 두어 지휘하게 하였다. 아울러 영안남도(현 함경남도)에 소속시켰다. 중앙에 올라가 왕이 친히 군대를 검열하는 대열(大閱) 등에 참가했을 때에는 오위(五衛)에 소속되었으나 중앙의 뒤쪽 지역 부대인 충무위(忠武衛)의 좌부(左部)에 속하였다.

변천

갑산도호부사는 갑산이 전략적으로 중요하기 때문에 『경국대전』의 규정과 달리 정3품 당상관이 임명되는 경우가 있었다. 후기에는 변방 수령으로 나가면 품계가 오르는 자리가 있는데, 『대전회통(大典會通)』에 갑산의 경우 통정대부로 올린다는 규정이 있어 법제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임진왜란 이후 지방 군제를 개편하면서 진관 소속에도 변동이 생겼다. 『속대전』에 이르러 진동(鎭東)에 종사품 관직인 병마만호가 추가로 설치되면서 정식으로 소속되었다.

지방군을 강화하고자 영장제(營將制)를 도입하여 처음에는 전임 진영장을 두었으나 비용이 많이 든다는 이유로 폐지했다. 병자호란 이후 충청도·전라도·경상도를 제외하고 다른 지역은 수령이 진영장을 겸임하게 했다. 효종 때 좌영(左營)을 설치했는데, 『속대전』에서도 갑산부사가 좌영장(左營將)을 겸하는 것으로 규정하였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대전통편(大典通編)』
  • 『속대전(續大典)』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민현구, 『조선초기 군사제도와 정치』, 한국연구원, 1983.
  • 서태원, 『조선후기 지방군제연구』, 혜안, 1999.
  • 육군본부, 『한국군제사 - 근세조선전기편 -』, 1968.
  • 차문섭, 『조선시대 군제연구』, 단국대학교출판부, 1973.
  • 오종록, 「조선초기 양계의 군사제도와 국방체제」, 고려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