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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전기 국왕의 의장 가까이에 배치된 근위 군사 또는 조선후기 궁궐의 각문 파수, 야간 숙직, 국왕의 전좌(殿座)나 거둥의 시위 등을 담당하던 근위 군사.

개설

조선전기에 근장군사는 국왕의 행차나 행사 때 임시로 오위 병력 중에서 차출되다가 조선후기에 들어와 임시로 고용군 10명을 쓰게 되었고, 영조대 이후에는 다시 정규군에서 선발되었다. 이들은 각문(各門)마다 1명씩 나누어 파수를 섰으며 주로 시끄럽게 하는 자를 금지하였다. 또한 밤이 되면 10명씩 돌아가며 번을 섰고, 국왕이 정사를 보거나 조회를 받기 위해 정전의 자리로 나오는 전좌(殿座)나 거둥할 때에는 7쌍이 장막 앞에 대령하며 그 나머지는 나누어 담당을 결정하여 위내(衛內)를 시찰하였다.

설립 경위 및 목적

고대 중국에서는 황제의 거가(車駕)에 수반되는 무기와 기치, 즉 의장(儀仗) 기물을 노부(鹵簿)라고 하였다. 노부 의장은 거가의 규모에 따라 달라졌다. 이는 조선시대에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예컨대 세종대 근정전 전정(殿庭)에서의 의장은 동지와 정월 초하루 및 탄일의 대조회의 경우에는 가장 큰 규모의 의장인 대장(大仗)이 사용되었고, 매달 음력 초하룻날에 행하는 삭일 조회 및 조참에서는 중간규모의 의장인 반장(半仗)이 사용되었다. 이처럼 제왕의 거가(車駕) 또는 궁중 행사에서 그 규모에 따라 의장을 달리함으로써 거가와 행사의 품격을 드러내는 한편 제왕의 권위를 드러내고자 하였다.

한편 거가 또는 궁중 행사 때 배치되는 의장 주변으로는 군사들이 배치되었는데, 이들 군사 중에서 의장에 가까이 배치된 군사들이 근장군사(近仗軍士)가 되었다. 즉 근장군사의 1차적인 의미는 ‘의장에 가까이 배치된 군사’로서 특정한 병력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었다.(『중종실록』12년 7월 10일) 다만 근장군사는 일반 군사가 아니라 거가 또는 궁중 행사의 의장을 호위하는 친위군의 역할을 하였기에 조선전기에는 중앙군인 오위(五衛) 병력 중에서 근장군사가 차출되었다.

그런데 이 같은 상황이 조선후기에 변하게 되었다. 『만기요람』에 의하면 근장군사는 본시 고용군 10명을 임시로 임명하곤 했는데, 1755년(영조 31)부터 정규군에서 선발된 특정 병력을 지칭하게 되었다. 즉 조선전기 근장군사는 국왕의 행차나 행사 때 임시로 오위 병력 중에서 차출되다가 조선후기 들어 임시로 고용군 10명을 쓰게 되었고, 영조대 이후에는 다시 정규군에서 임명한 특정 병력이 되었던 것이다.

조직 및 역할

조선후기에 일종의 급료를 받는 직업군인인 급료병 10명으로 시작된 군장군사는 1755년(영조 31) 정규직이 되었으며, 1777년(정조 1년) 이후 인원이 증가되어 27명까지 늘었다. 그러다가 1789년(정조 13년)에 20명이 정원으로 확정되었다. 이들 군장군사는 각문(各門)마다 1명씩 나누어 파수를 섰으며 주로 시끄럽게 하는 자를 금지하였다. 또한 밤이 되면 10명씩 돌아가며 번을 섰고, 국왕이 전좌(殿座)하거나 거둥할 때에는 7쌍이 장막 앞에 대령하며 그 나머지는 나누어 담당을 결정하여 경계 구역을 시찰하였다. 요컨대 근장군사의 임무는 궐문 수비와 야간 숙위 그리고 국왕의 행차와 행사 호위였다.

이들 근장군사에게는 처음에 월급으로 포(布)만 지급되었다. 그러다가 1788년(정조 12)부터는 포와 함께 매달 20명의 근장군사에게 백미 8석이 지급되었다.

한편 군장군사의 궐문 수비와 야간 숙위는 주로 궁궐 출입자 확인이 핵심이었다. 조선시대 궁궐에 출입하는 사람들은 신분증이 있어야 했고, 특히 야간 숙직자는 숙직자 명부인 생기(省記)에 명단이 들어가야 했다. 따라서 근장군사는 궁궐 출입자의 신분증을 확인하고 불법으로 출입하는 자는 색출하여 처벌하였다.(『영조실록』즉위년 10월 18일)

변천

조선시대의 근장군사는 근본적으로 전통시대 동양의 제왕 거가에 수반되는 노부 의장에 관련된 군사였다. 따라서 거가와 노부 의장의 관념이 바뀌면 거가와 노부 의장 자체는 물론 근장군사 역시 바뀔 수밖에 없다. 『승정원일기』에 의하면 근장군사라는 용어는 1886년(고종 23)까지 등장한다.그 이후 근장군사라는 용어가 등장하지 않는 이유는 근장군사가 새로운 병력으로 대체되었을 가능성이 큰데, 특히 갑신정변과 갑오개혁을 거치면서 조선시대의 전통군제가 신군제로 크게 바뀌는 과정에서새로운 병력으로 대체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참고문헌

  • 『日省錄』
  • 『承政院日記』
  • 『經國大典』
  • 『大典會通』
  • 『萬機要覽』
  • 심헌용, 『한말 군 근대화 연구』,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2005.
  • 육군사관학교 한국군사연구실, 『한국군제사 : 근세조선후기편』, 육군본부, 1977.
  • 이근호 외, 『조선후기의 수도방위체제』, 서울학연구소, 1998.
  • 국사편찬위원회 홈페이지(http://www.history.go.kr) 한국역사정보통합시스템, 시소러스 검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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