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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1:43 기준 최신판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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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무령역 |
한글표제 | 무령역 |
한자표제 | 撫寧驛 |
상위어 | 수성도(輸城道) |
관련어 | 온성도호부(穩城都護府), 역리(驛吏), 역노(驛奴), 역비(驛婢), 역도(驛道), 속역(屬驛), 역승(驛丞), 찰방(察訪) |
분야 | 경제/교통/육운 |
유형 | 집단·기구 |
집필자 | 홍성욱 |
폐지 시기 | 1896년(건양 원년)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무령역(撫寧驛) |
조선시대 함길도 지역의 역도 중 하나인 수성도에 속한 역.
개설
무령역(撫寧驛)은 조선 세종대에 온성도호부에 설치되었으며, 조선시대 전기의 역참 제도가 완비된 『경국대전(經國大典)』 체제에서는 오촌역(吾村驛)·주촌역(朱村驛) 등과 함께 함길도의 역도(驛道)인 수성도(輸城道)에 소속되었다. 이후 조선시대 후기까지 존속하다가, 갑오개혁 때 역참제가 철폐됨에 따라 함께 폐지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1440년(세종 22)에 함경도 지역에 자리 잡고 있던 여진족을 몰아내고 온성도호부를 설치한 뒤, 경원(慶源) 및 길주(吉州) 이남 각 고을의 민호(民戶)를 안변(安邊) 이북으로 옮기는 과정에서 신설되었다.
조직 및 역할
영조 때 편찬된 『여지도서(輿地圖書)』 함경도 온성도호부 조에 따르면, 당시 무령역에는 역리(驛吏) 210명, 역노(驛奴) 32명, 역비(驛婢) 24명과 상등마 2필, 하등마 4필 등 총 6필의 역마가 배속되어 있었다.
변천
1440년(세종 22) 온성도호부를 설치하면서 신설한 역으로, 초기에는 무령참으로 『세종실록』「지리지」 함길도 온성도호부 조에 기록되어 있다. 한편 『세종실록』「지리지」 함길도 조의 역도 및 속역 내역에서는 그 명칭을 찾을 수 없는데, 이는 『세종실록』「지리지」가 1432년(세종 14)에 편찬된 『신찬팔도지리지』를 저본으로 작성되어, 1440년 온성도호부와 함께 무령역이 신설된 사실이 반영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무령역은 온성도호부와 함께 신설되어 함길도 지역의 수성도에 편입되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이는 조선의 역도 체제가 반영된 『경국대전』에서 무령역이 수성도의 속역으로 편제된 사실, 그리고 『경국대전』의 역도 체제가 반영된 1462년(세조 8)의 전국적인 역로 개편에서 함길도(咸吉道)·평안도의 찰방은 예전대로 한다는 내용을 통해서 세조대 이전에 이미 무령역이 수성도찰방에 소속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성종대에 『경국대전』이 반포되면서 확정된 조선시대 전기의 역도 체제에서는 무령역은 영안도 지역의 역도인 수성도에 소속되어 조선시대 후기까지 존속하다가, 1896년(고종 33) 1월에 대한제국 칙령 제9호 ‘각 역 찰방 및 역속 폐지에 관한 건’에 따라 폐지되었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 『여지도서(輿地圖書)』
- 조병로, 『한국근세 역제사연구』, 국학자료원,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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