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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1:43 기준 최신판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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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내병조 |
한글표제 | 내병조 |
한자표제 | 內兵曹 |
관련어 | 병조(兵曹) |
분야 | 정치/행정/관청 |
유형 | 집단·기구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 |
왕대 | 조선 |
집필자 | 윤훈표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내병조(內兵曹)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세조실록』 4년 8월 1일, 『중종실록』 7년 2월 1일, 『중종실록』 29년 12월 20일, 『세조실록』 4년 8월 1일, 『세조실록』 5년 1월 20일, 『명종실록』 2년 11월 10일, 『고종실록』 31년 10월 26일 |
조선시대 궐내의 긴급한 군사 업무를 처리하기 위해 정궁인 경복궁이나 창덕궁 내 에 설치한 병조의 분사.
개설
군사에 관한 업무를 관장하던 병조(兵曹)는 궁궐 밖에 있어 왕의 신상에 관한 위급한 사태가 발생하거나 궁중 숙위(宿衛) 등의 일을 처리할 때 여러 가지 불편한 점이 많았다. 이에 궐내에 그 분사(分司)인 내병조를 설치하여 병조 관련 업무를 처리하되 특히 궁중의 숙위에 관한 업무나 의장(儀仗) 활동 등을 맡아서 다스리도록 하였다. 그 기능상 왕의 최측근에 반드시 있어야 하는 관계로 정궁에 설치되었는데, 조선전기에는 경복궁에 있었고 조선후기에는 창덕궁 등에 있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군사 관련 업무를 관장하였던 병조가 대궐 밖에 있었기 때문에 긴급 상황이 발생했을 경우에는 신속한 대처가 어려웠다. 이에 별도로 대궐 안에 그 지소를 설치하고 관원을 배치해서 만약의 위급한 상황이 일어났을 경우에 대비하고자 했다. 평상시에는 궁중의 숙위에 관한 업무나 행사 등의 의장 활동 등을 맡아서 처리하도록 했다.
내병조와 유사한 성격의 기구나 조직이 일찍부터 궁궐 내에 있었을 가능성은 매우 높다. 그러나 기록상으로 확인되는 것은 세조 이후이다(『세조실록』 4년 8월 1일). 아마도 그 이전부터 비슷한 조직이 존재했을 것이나 세조 때에 이르러서 하나의 명실상부한 기구로 확립된 듯하다. 뿐만 아니라 세조 때 이후로 그 담당하는 업무와 궐 밖에 있는 병조, 간혹 외병조(外兵曹)로 부르던 기구와의 관계도 뚜렷하게 정해진 듯하다. 정확하게 언제 어떤 경로로 설치되었는지는 확실치 않은데, 정변을 통해 즉위했으며 그로 인해 정치적 불안감이 쉽게 가시지 않았던 세조 때 그 면모가 분명해졌다.
조직 및 역할
내병조의 조직에 대해서는 분명한 기록이 없다. 다만 병조의 관원을 보면 이조 등과는 달리 당상관(堂上官)에는 판서 등 이외에 참지가 있고, 낭관도 이조 등이 각각 3~4속사에 정랑·좌랑 1명씩이 편제되어 그 사에 부여된 일을 관장하였음과는 달리 무선·승여사는 정랑·좌랑 각1명이 편제되나 숙위 등사를 관장한 무비사에는 정랑·좌랑 각 2명이 편제되어 그 사의 일을 담당하도록 되었다. 이에서 참지의 지휘하에 무비사 정랑·좌랑 각 1명이 내병조사를 전담한 것으로 추측된다. 또 중종대에 궐내에 입직한 인물로 가좌랑(假佐郞)김한로(金漢老)가 확인됨에서(『중종실록』 7년 2월 1일) 숙위할 병조의 낭관들이 부족하면 임시로 마땅한 사람을 정해서 근무하게 한 듯하다.
주된 임무는 궐내의 시위(侍衛)나 숙위에 관한 사항, 의장 등에 대한 조치 등이었다. 숙위군의 명부(名簿)라고 할 수 있는 성기(省記)도 내병조에서 관리하였다(『중종실록』 29년 12월 20일). 아울러 궐문의 자물쇠 등을 간수하는 것도 중요한 업무였다. 궐내에서, 그것도 왕의 최측근에 있었기 때문에 통상적인 업무 외에도 여러 가지 일에 간여하였다. 시위 등에 참여했던 장수들을 모아 놓고 진법(陣法)을 가르치거나(『세조실록』 4년 8월 1일), 명령을 어기거나 규칙을 위반하는 자들을 체포해서 국문(鞠問)하기도 했다(『세조실록』 5년 1월 20일).
한편 건국 초부터 예종 때까지 일어났던 정변과 전쟁, 그리고 외침의 전말을 기록했던 『무정보감(武定寶鑑)』의 후속편인 『속무정보감(續武定寶鑑)』을 명조 때 내병조에 국(局)을 설치하여 수찬하게 했다(『명종실록』 2년 11월 10일).
변천
내병조는 그 기능상 왕이 거처하는 궁궐에 반드시 있어야 했기 때문에 만약 왕이 거처하는 궁궐이 바뀌면 그 설치 장소가 달랐다. 대개 조선초기에는 경복궁 근정문(勤政門) 인근에, 조선후기에는 창덕궁 호위청(扈衛廳) 서쪽이나 경희궁에는 건명문(建明門) 밖 동쪽에 각각 있었다. 그러나 『동궐도(東闕圖)』에 의하면 창덕궁에는 인정전으로 들어가는 인정문 맞은편, 진선문과 숙장문 사이의 남쪽 행각에 있었다. 아마도 시기에 따라 그 위치가 달라지기도 했던 듯하다.
『대전통편』에서는 군무(軍務)에 관한 일을 어긴 사람이나 대궐문에 허가 없이 함부로 들어간 사람 이외에는 곤장(棍杖)을 쓰지 못하게 하면서 그에 관한 제도는 오로지 『흠휼전칙(欽恤典則)』을 준수하도록 했다. 그런데 예외적으로 내병조에서는 곤장 가운데 중간급 곤장인 중곤(中棍)을 쓸 수 있도록 규정했다.
1895년 갑오개혁이 단행되면서 내병조에서 관할하던 사무가 궁내부(宮內府)로 이관되면서 혁거되었다(『고종실록』 31년 10월 26일). 그러나 그 기능은 이듬해 다시 시종원(侍從院)으로 이관되어 한말까지 계승되었다.
참고문헌
- 『대전회통(大典會通)』권4, 병전(兵典), 용형(用刑)
- 『동궐도(東闕圖)』(1825~1835년 제작, 고려대학교박물관 소장)
- 한충희, 『조선초기 육조와 통치체계』, 계명대학교출판부,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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