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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1:18 기준 최신판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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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오적어 |
한글표제 | 오적어 |
한자표제 | 烏賊魚 |
대역어 | 오징어 |
관련어 | 마른오징어[乾烏賊魚] |
분야 | 생활·풍속/식생활/음식 |
유형 | 식재료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 |
집필자 | 차경희 |
생산지 | 제주도, 충청도, 전라도, 평안도 |
수확시기 | 음력 4월 |
관련 의례 | 천신제(薦新祭)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오적어(烏賊魚)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성종실록』 3년 6월 9일, 『정조실록』 12년 9월 30일, 『문종실록』 2년 4월 6일, 『성종실록』 8년 8월 17일, 『선조실록』 35년 7월 10일, 『연산군일기』 7년 1월 30일 |
천신제를 지낼 때 올리던 제물 중 하나로, 음식 재료로 사용한 두족류(頭足類) 십완목(十腕目)에 속하는 연체동물.
개설
4월의 천신(薦新) 물품이었으며, 연회에도 사용하던 음식 재료이다. 서해안의 여러 곳에서 잡아 진상하였다.
원산지 및 유통
『세종실록』 「지리지」에 경기도, 충청도, 전라도, 평안도 등에 속하는 9개 군현의 토산으로 기록되어 있다. 『도문대작(屠門大嚼)』에서는 서해에서는 일부 지방에서만 잡히는데 흥덕(興德)과 부안(扶安)에서 잡히는 것이 가장 좋다고 하였다.
제주도와 전라도·경상도 등지에서 진상되었는데, 기후나 전염병 같은 원인에 의해 생산량이 감소되기도 하였으므로, 세액의 감면을 위한 상소가 많았다. 성종대에는 경상도와 전라도에서 생산되는 오징어가 제주도산보다 크기가 작은데, 생산되는 바에 따라 봉진하여 백성들에게 폐단을 끼치지 말도록 하였다(『성종실록』 3년 6월 9일). 정조대에는 제주도에 전염병으로 사람이 많이 죽자, 매월 바치는 물선(物膳) 중에 추복(追鰒)·인복(引鰒)·오적어(烏賊魚) 등에 대한 세액을 감하고 수효도 즉시 줄이도록 하였다(『정조실록』 12년 9월 30일).
『만기요람(萬機要覽)』 「재용」편에는 공상(供上)된 오징어의 가격이 기록되어 있다. 생오징어[生烏賊魚]는 30마리인데 마리당 6전, 오징어뼈[烏賊魚骨]는 매냥에 5승이었다. 『성호사설(星湖僿說)』「만물문(萬物門)」에서 오징어는 문어와 비슷하게 생겼는데 맛이 썩 좋아서 귀중한 식품으로 꼽히고, 문어와 비슷한데 다리가 아주 짧기 때문에 약간 구별된다고 하였다.
연원 및 용도
『규합총서(閨閤叢書)』에는 오적어와 관련된 고사가 있다. 오징어가 물 위에 떠 있다가 까마귀를 보면 죽는 척하기 때문에 오적어라 한다. 오징어 먹물로 글씨를 쓸 수 있는데 해가 바뀌면 빛이 없어져 빈 종이가 된다고 하였다. 『종묘의궤(宗廟儀軌)』에서는 4월의 천신 물품으로 기록되어 있고, 동지(冬至)용으로 전라도에서 오적어를 진상하기도 하였다.
중국과 일본과의 교역품으로 이용되었다. 중국 황실에 오고가는 물목에 반드시 들어 있었다. 명(明)에서 온 사신에게 오징어나 마른오징어[乾烏賊魚]를 선물하였다(『문종실록』 2년 4월 6일). 특히 성종대에 중국 황제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한 성절(聖節) 하례(賀禮) 물목 50여 종이 2차례에 나뉘어 기록되어 있다. 물목 중에 황제에게 진헌하는 오징어 2,000마리와 성절사 처소에 보내는 오징어 300마리가 있다(『성종실록』 8년 8월 17일).
『동사록(東槎錄)』에는 일본에는 오적어를 비롯한 해물이 연해(沿海)에서 나지 않는 곳이 없다고 하였다. 또 경상도관찰사이시발(李時發)은 귤지정(橘智正)이 가지고 온 물품에 조총 10정, 산달피(山獺皮) 16속(束), 단목(丹木) 15근, 오징어 70속 등이 있는데, 지정은 묵묵히 말이 없으나 왜병의 졸병 말을 들어 보면 매매하고 싶어 하는 것이 분명하다고 한 것으로 보아 일본과의 무역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선조실록』 35년 7월 10일).
오징어는 생것으로 회·볶음·찜·젓갈 등에 이용하였고, 말려서 마른 찬으로 이용하였다. 『음식책(飮食冊)』에는 가을철에 차리는 교자상에 오징어를 회로 하여 올린다고 하였다.
『규곤요람(閨壼要覽)』에는 강회를 만드는 법이 나와 있다. 미나리는 데치고, 파는 더운 물에 잠깐 헹궈 내고, 달걀노른자와 흰자를 각기 부쳐서 길이는 5푼만 되게 하고 너비는 젓가락 짝 너비만 하게 썬다. 낙지나 제육이나 오징어나 조기는 달걀과 같이 썰고, 고추는 달걀 너비 반만큼 썰어서 색을 맞춰 쥐고 파 잎으로 감아서 잣을 1개씩 박아 동곳 꽂듯이 한다고 하였다. 『규합총서』에는 그 살을 얇게 저며 골패 모양같이 썰어 기름 쳐 슬쩍 볶고, 추포는 물에 불려 썰어 닭 속에 깻국을 걸러 여름에 쓰면 소담하고 영계찜에 넣어도 좋다고 하였다.
『시의전서(是議全書)』의 각색 젓갈 중에 오징어젓이 기록되어 있다. 제주에 사는 내섬시(內贍寺)의 종 장회이(張廻伊)가 일본에 표류하였을 때 일본인들이 고등어, 오징어, 방어, 도미, 대구, 청어, 상어 등의 날것을 소금에 절여 이용한다는 것으로 보아 우리나라와 일본에서 오징어를 젓갈로 이용한 것을 알 수 있다(『연산군일기』 7년 1월 30일).
찬합에 넣는 음식으로 『윤씨음식법(尹氏飮食法)』에서는 화복과 말린 오징어는 골패만큼씩 베어 넣으라 했고, 『시의전서』에는 오징어포를 포함한 여러 어물 말린 것을 넣었다. 이때 마른 오징어를 떡가루 속에 묻어 두어 부드러워지면 꺼내 칼로 오려 문어오림처럼 오징어오림을 만들 수 있다고 하였다. 오징어는 생문어(生文魚), 생연어(生鰱魚), 생송어(生松魚) 등과 함께 궁중의 연회에도 사용되었다.
생활민속 관련사항
오징어뼈는 의료용으로도 사용되었다. 『산림경제(山林經濟)』「치약(治藥)」편에 오징어뼈는 해표초(海螵蛸)라고도 한다. 동해와 서해에서 사는데 아무 때나 잡는다. 오징어는 뼈가 하나뿐인데 두께가 3~4푼이며 작은 배 같고 가볍다. 부인의 누혈(漏血)에 효과가 좋다. 황색이 되도록 물에 삶아 껍질을 제거하고 가늘게 갈아 수비(水飛)한 다음 햇볕에 말려 사용한다고 하였다. 『규합총서』에는 오징어뼈를 우물 가운데 담그면 잡벌레가 다 죽는다고 하였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규곤요람(閨壼要覽)』
- 『규합총서(閨閤叢書)』
- 『도문대작(屠門大嚼)』
- 『동사록(東槎錄)』
- 『만기요람(萬機要覽)』
- 『산림경제(山林經濟)』
- 『성호사설(星湖僿說)』
- 『시의전서(是議全書)』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윤씨음식법(尹氏飮食法)』
- 『음식책(飮食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