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축환국(辛丑換局)"의 두 판 사이의 차이
(XML 가져오기) |
(차이 없음)
|
2017년 12월 10일 (일) 01:05 기준 최신판
주요 정보 | |
---|---|
대표표제 | 신축환국 |
한글표제 | 신축환국 |
한자표제 | 辛丑換局 |
상위어 | 신임옥사(辛壬獄事) |
관련어 | 건저대리(建儲代理), 임인옥사(壬寅獄事) |
분야 | 정치/정치운영/정쟁·정론 |
유형 | 사건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후기 |
집필자 | 이근호 |
발생시기 | 1721년(경종 1) |
관련 인물/집단 | 경종, 영조/노론, 소론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신축환국(辛丑換局) |
1721년(경종 1) 정국을 주도하는 세력이 노론에서 소론으로 교체된 사건.
개설
1721년 노론에서 소론으로 정권이 교체되었는데, 신축년에 정권이 교체되었다는 의미에서 신축환국(辛丑換局)이라고 한다. 당시 노론 측에서는 경종의 나이가 30세가 넘었는데 후계자가 없자 왕세제를 세울 것을 요구했다. 왕세제의 책봉과 관련된 노론 측의 요구는 관철되었으나, 이후 노론 측이 추진한 대리청정 요구는 소론 측의 반격으로 실패하였다. 그리고 이를 계기로 정권이 교체되었다. 신축옥사는 1722년에 있었던 임인옥사(壬寅獄事)와 함께 노론에게 치명적인 화를 불러온 사건이며, 영조 연간 주요한 정치 사안이 되었다.
역사적 배경
숙종대 후반 노론 우위의 정국에서 1718년(숙종 44) 왕과 노론 측 이이명과의 독대(獨對)가 행해졌다. 이 사건은 숙종의 후계 문제를 둘러싸고 논란을 증폭시켰다. 당시 노론 측에서는 독대를 통해 왕의 특명이 있었다고 하여 대리청정하는 세자를 보필하는 한편 나중을 대비하여 연잉군과 연령군 두 왕자의 보호를 자처하였다. 이로써 이전까지 사문(斯文) 시비 위주로 전개되던 노론과 소론 간의 대립은 왕위 계승 문제를 중심으로 충역(忠逆)의 시비 분쟁으로 변하였다.
발단
경종 즉위 후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있던 노론 측에서는 경종의 나이가 30세를 넘겼는데도 아직 후사가 없는 것을 문제 삼아 왕세제의 책봉을 추진하였다. 1721년 8월 20일 정언이정소(李廷熽)가 상소하여 저사(儲嗣), 즉 왕세자를 세울 것을 요청한 것이 시작이었다[『경종실록』 1년 8월 20일]. 이정소의 상소를 시작으로 노론 측의 요구가 거세졌으며 경종은 이를 윤허하였다. 왕대비인 인원왕후는 언문 교서를 내려, 효종대왕의 혈맥과 선대왕의 골육은 당시 왕인 경종과 연잉군 뿐이라는 이른바 삼종혈맥(三宗血脈)을 내세워 연잉군의 세제 책봉을 정당화하였다.
당시 소론 측에서는 왕세제 책봉 그 자체를 문제 삼을 수는 없었고, 다만 책봉 과정에 대해서 소론 측 신료들이 배제된 것을 문제 삼으며 논란을 제기하였다.
이런 와중에 같은 해 10월 10일 조성복(趙聖復)이 상소하여 왕세제에게 서무를 대리하도록 하자고 하였다[『경종실록』 1년 10월 10일]. 이를 통해 경종에게 정무를 놓게 하려는 의도였다. 이 문제로 노론과 소론은 정면충돌하는 양상을 보였다.
경과
조성복의 상소를 접한 경종은 처음에는 이를 윤허하였다. 그러나 이후 소론 측 최석항의 눈물 어린 간언을 받아들여 그 명령을 환수하였다. 같은 해 10월 13일 전·현직 대신과 2품 이상 관원, 삼사(三司)의 관원을 모아 놓고 경종은 비망기를 내려, 전날에 허락한대로 시행하도록 명령하였다[『경종실록』 1년 10월 13일].
경종의 명령이 있자 김창집·이이명·이건명·조태채 등 노론 측 관원들은 의례적인 정청(庭請)을 열어, 대리청정을 허가한 하교를 거두도록 요구하였다. 김창집 등은 정청을 통해서 몇 차례 요구하였으나 나라를 위해 결단했다는 경종의 의지를 확인한 뒤에는 소론 측 최석항이나 이광좌 등의 반대를 무릅쓰고 정청을 철수하였다.
이어 김창집 등은 왕세제가 대리청정할 때 필요한 대리절목(代理節目)을 제정해서 연명(聯名)으로 왕에게 올렸다[『경종실록』 1년 10월 17일]. 이를 당시 기록에서는 연차(聯箚)라고 하였다. 그러나 소론 측 최석항과 우의정조태구의 눈물 어린 간언을 받아들여 결국 경종은 다시 대리의 명을 거두었다. 이를 기록에서는 반한(反汗)이라고 한다.
대리 명령이 철회되면서 정국은 급속도로 소론 측에 유리해졌다. 이에 소론 측에서는 노론에 대한 반격을 시도하였다. 군신(君臣)의 기강을 엄격하게 세울 것을 요구한 김일경(金一鏡)·박필몽(朴弼夢)·이명의(李明誼)·이진유(李眞儒)·윤성시(尹聖時)·정해(鄭楷)·서종하(徐宗廈) 등 이른바 소하(疏下) 7명의 상소도 이런 상황에서 제출되었다[『경종실록』 1년 12월 6일]. 이를 빌미로 김창집을 비롯한 노론 측 인사들이 차례로 파면되고 정국은 소론 일색으로 변하였다. 이를 신축옥사라 한다.
신축옥사 이후 1722년 목호룡의 고변(告變)이 있었고, 이를 계기로 임인옥사가 일어나면서 노론 측은 엄청난 피해를 감당해야만 하였다.
참고문헌
- 정만조, 「영조대 초반의 탕평책과 탕평파의 활동: 탕평 기반의 성립에 이르기까지」, 『진단학보』56, 1983.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