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종혈맥(三宗血脈)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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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삼종혈맥 |
한글표제 | 삼종혈맥 |
한자표제 | 三宗血脈 |
관련어 | 건저(建儲) |
분야 | 정치/용어 |
유형 | 개념용어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후기 |
왕대 | 조선후기 |
집필자 | 이근호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삼종혈맥(三宗血脈)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경종실록』 1년 8월 20일, 『영조실록』 1년 6월 12일, 『영조실록』 9년 12월 7일, 『영조실록』 11년 1월 21일 |
조선후기에 영조가 효종과 현종, 숙종을 잇는 혈육임을 강조한 용어.
개설
삼종혈맥은 조선의 제17대 왕인 효종부터 현종, 숙종으로 이어지는 혈통을 계승한다는 의미의 용어이다. 1720년(경종 1) 노론 세력이 후사가 없는 경종의 뒤를 이어 세제 책봉, 즉 건저(建儲)를 추진하여 후일의 영조인 연잉군(延礽君)을 왕세제로 책봉하였다. 이에 대한 정당성을 보장해 주는 논리가 삼종혈맥이었다.
내용 및 특징
삼종혈맥이 문제가 된 것은 경종 연간으로, 경종은 즉위 후 나이가 30세 이상 되었는데도 후사가 없었다. 이에 당시 정국을 주도하던 김창집·이이명 등 노론 세력들은 속히 왕세제를 세우는, 즉 건저를 추진하였다. 김창집 등의 주장에 대해 경종은 이를 당시 왕대비였던 인원왕후(仁元王后)에게 전달하였고, 왕대비는 언문교서(諺文敎書)를 내려 이를 대외적으로 천명하였다.
당시 인원왕후는 언문교서에서 효종대왕의 혈맥과 선대왕의 골육으로 경종과 연잉군만이 있음을 거론하여 연잉군의 왕세제 책봉을 인정하였다(『경종실록』 1년 8월 20일). 왕대비의 언문교서는 다시 전지(傳旨)로 작성되어 연잉군의 왕세제 책봉을 대외적으로 천명하였다. 왕대비가 거론한 삼종혈맥이라는 논리는 연잉군의 왕세제 책봉이 정당성을 보장받는 중요한 논리가 되었다.
변천
영조 즉위 이후 삼종혈맥의 논리는, 노론 세력의 건저 운동에 대한 정당성을 확보하는 논리이자, 소론 세력에 대해 보복하는 중요한 근거로 기능하였다. 예컨대 1725년(영조 1) 6월 이휘진(李彙晉)은 상소에서, 신임옥사(辛壬獄事)는 소론 세력이 선왕인 경종의 우애를 손상시키고 삼종혈맥을 단절시키려고 한 것이라고 한 바 있다(『영조실록』 1년 6월 12일).
삼종혈맥은 또한 영조의 후사를 걱정하는 논리로도 기능하였다. 1733년 효장세자(孝章世子)가 사망한 후 왕자의 출산 없이 계속 옹주가 태어나자 영조는 그 서운함을 삼종혈맥의 존망으로 표현하기도 하였다(『영조실록』 9년 12월 7일). 1735년 후일의 사도세자(思悼世子)가 태어나자 삼종혈맥이 장차 끊어지려고 하다가 비로소 이어지게 되었다고 표현하기도 하였다(『영조실록』 11년 1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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