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유처분(己酉處分)"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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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1:05 기준 최신판



1729년(영조 5) 경종 연간에 발생한 신임옥사를 둘러싼 노론과 소론의 정치 의리를 절충하여 처분을 내린 사건.

개설

1729년 노론과 소론의 중요 정치 현안이었던 신임옥사(辛壬獄事)에 대해서 일부는 충(忠), 일부는 역(逆)으로 절충한 사건이다. 이는 영조가 새롭게 정국을 주도하게 된 탕평파의 집권 명분을 확보하고 정치 세력의 조제를 추진하기 위한 의도가 있는 처분이었다.

역사적 배경

신임옥사(辛壬獄事)란 1721년(경종 1)과 1722년(경종 2)에 발생한 옥사를 통칭하는 것이다. 경종 즉위 후 노론 측에서 왕세제 책봉 운동을 통해 연잉군(延礽君), 즉 후일의 영조를 왕세제로 책봉하였다. 노론 측은 계속해서 병약한 왕을 대신해 왕세제에 의한 대리청정을 추진하였다. 이를 건저대리(建儲代理)라고 한다. 그러나 대리청정은 소론 측의 저지로 결국 실패로 돌아갔으며, 이후 소론 측의 정치 공세가 가속화되었다. 특히 1722년 삼수옥(三手獄)이라고 하는 임인옥사(壬寅獄事)가 전개되면서 상당수의 노론 측 신료들이 화를 당하였다. 뿐만 아니라 옥사의 전개 과정에서 왕세제 관련설이 제기되면서 연잉군 역시 정치적 곤경에 처하였다. 영조는 즉위 후 정통성의 확보를 위해 이와 관련된 혐의를 벗는 것이 중요하였다.

발단

1725년(영조 1) 영조는 을사처분(乙巳處分)을 단행하여 정국을 주도하던 소론 세력 대신 그 동안 정치에서 소외되었던 노론 세력을 불러들였다. 영조는 자신을 지지했던 노론 세력을 불러들여 정국의 안정을 기도했으나, 노론 세력은 영조의 의도와는 달리 소론 세력에 대한 보복을 지속적으로 주장하면서 정국을 혼란스럽게 했다. 이에 영조는 노론 세력에 대해 회유나 위협 등을 통해 자제를 촉구하는 한편 노론 세력 내에서 논의가 온건한 완론(緩論)을 주장하던 홍치중(洪致中)과 같은 세력들을 불러들여 탕평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영조의 노력은 노론 측의 강경 자세로 인해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이에 영조는 1727년(영조 3) 정미환국(丁未換局)을 단행하여 이광좌(李光佐)를 중심으로 한 소론 세력들을 불러들이는 한편 탕평론을 주장하던 조문명(趙文命)·조현명(趙顯命)·송인명(宋寅明) 등을 모아 탕평 세력을 구축하기 시작하였다. 1728년(영조 4) 이인좌(李麟佐)의 난 또는 무신란(戊申亂)이라 불리는 반란을 진압한 후 영조는 반란의 원인이 당쟁에 있음을 지적하면서 새롭게 구축된 탕평파를 중심으로 본격적으로 탕평을 추진하였다. 정국을 주도하게 된 탕평파에게는 자신들의 집권 명분을 확보하는 일이 필요하였으며, 그 결과가 1729년(영조 5) 기유처분으로 나타났다.

경과

정국을 주도하게 된 탕평파들은 노론 세력 내에서 완론 세력인 홍치중 등의 협조를 받아 노론과 소론 사이의 중요한 정치 현안이었던 신임옥사에 대한 판정에 나서게 되었다. 당시 노론 측 완론 세력들의 주장은 1721년에 있었던 신축옥사와 1722년에 있었던 임인옥사를 분리, 전자는 충(忠)으로, 후자는 역(逆)으로 규정하여 임인옥사로 인해 화를 당한 노론 측 인물, 특히 노론 4대신인 이이명(李頤命)·이건명(李健命)·김창집(金昌集)·조태채(趙泰采) 모두의 신원을 요구하였다(『영조실록』 4년 9월 24일).

탕평파의 입장에서 이런 노론 측의 주장을 모두 수용할 수는 없었다. 임인옥사 때 노론을 역으로 규정하고 처벌을 주도했던 소론 세력이 동조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이에 탕평파는 절충안을 내세웠는데, 신임옥사의 계기가 되었던 노론 측의 왕세제 책봉과 대리청정 요구, 연명(聯名)으로 대리청정 절목을 올린 것은 역이 아닌 것으로 규정하여 노론 측 이건명과 조태채는 신원하되, 나머지 김창집과 이이명은 그 자손들이 임인옥사와 관련되었기에 연좌를 적용해서 그대로 죄안(罪案)에 남겨 두자는 것이었다(『영조실록』 5년 3월 6일).

탕평파의 이 같은 주장은 소론은 물론이고 노론, 남인 등 당시 정치 세력 모두 반대하였다. 그러나 노론과 소론의 조정과 병용(竝用)을 추진하였던 영조는 이 의견을 받아들여 기유처분으로 발표하였고 이로써 탕평파의 의도가 결실을 맺게 되었다. 훗날 영조의 기유처분에 대해 ‘피차를 진정시키기 위한 방도’로 추진하였다는 지적이 있었다(『영조실록』 12년 5월 5일). 이를 계기로 소론 내 준론 세력인 이광좌 등이 조정에서 물러나고 그에 대신해 노론 내 완론 세력인 홍치중과 김재로 등이 진출하면서 노론과 소론 출신 탕평파가 주도하는 정국이 구축되었다.

참고문헌

  • 정만조, 「영조대 초반의 탕평책과 탕평파의 활동: 탕평 기반의 성립에 이르기까지」, 『진단학보』56, 19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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