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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1:05 기준 최신판



1694년(숙종 20)에 남인이 물러나고 서인이 집권하여 인현왕후를 복위시킨 사건.

개설

기사환국 이후 장희빈의 행동이 방자해지고 불미스러운 일이 거듭되자 숙종은 인현왕후에게로 마음이 돌아섰고, 서인의 폐비 복위(復位) 운동을 지지하고 남인을 제거하여 서인을 등용시켰다. 이로 인해 인현왕후는 다시 중전으로 복위되었고, 장희빈은 사약을 마시고 죽었다.

배경

1694년 갑술년을 전후로 당파들은 정권 유지와 탈환을 위해 상호 간에 치열한 정탐과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 남인들은 함이완(咸以完) 등이 민암(閔黯)과 결탁해 서인을 축출하기 위한 추국을 진행 중이었다. 한편 서인 쪽에서는 김만기(金萬基)의 손자 김춘택(金春澤), 한구(韓構)의 아들 한중혁(韓重爀)을 중심으로 은화(銀貨)를 모으고 궁중과 내통하여 인현왕후의 복위와 환국(換局)을 모의했다.

그런데 숙종은 국청(鞫廳)에 참여한 대신들의 모든 관작을 빼앗고[削奪] 도성 밖으로 추방[門外黜送]했는데, 특별히 민암과 의금부 당상들의 경우 외딴섬[絶島]으로 보내 그 섬 밖으로 이동하지 못하도록 했다. 그리고 군영(軍營) 대장과 근시(近侍) 관리를 서인으로 교체했고, 남구만(南九萬)·박세채(朴世采)·윤지완(尹趾完) 등을 대신으로 등용했다. 한편 국본(國本)인 왕세자를 동요하거나 인현왕후·홍치상(洪致祥)·이사명(李師命)을 위해 변명·구원하는 자는 역률(逆律)이나 중률(重律)로 엄히 다스리겠다고 지시하여 환국(換局)을 일단락 지었다(『숙종실록』 20년 4월 1일).

경과

숙종은 함이완·민암 등을 국문하는 과정에서 장희재(張希載)와 결탁한 사실이 드러나 국문하도록 지시했다. 이때 남구만은 장희재가 왕세자의 지친(至親)이고 민암은 나이가 80세가 넘었으니 국문하지 말 것을 요청했으나 숙종은 민암과 장희재의 국문을 진행했다(『숙종실록』 20년 5월 20일). 결국 민암·민종도(閔宗道)·이의징(李義徵) 등은 처형되었고, 권대운(權大運)·목내선(睦來善)·이현일(李玄逸)·장희재 등은 유배되었다.

한편 서인에 대한 복관(復官)·사제(賜祭) 등의 포상(褒賞)도 함께 이루어졌다. 숙종은 김석주(金錫冑)와 민정중(閔鼎重)을 복관·사제했고, 송시열(宋時烈)의 죄목이었던 효종 폄하설, 종통(宗統) 혼란설 등이 근거 없음을 인정하고 그를 복관·치제(致祭)토록 지시했다. 그리고 기사년 인현왕후를 폐비(廢妃)하는 과정에서 유배되거나 사사되었던 오두인(吳斗寅)·박태보(朴泰輔) 등에 대한 복관과 증직(贈職)도 시행되었다. 이외에도 김석주 등 5명의 보사공신(保社功臣) 및 김수항(金壽恒)·김수흥(金壽興)·조사석(趙師錫)·홍치상·김만중 등을 복관하고 석방했다. 또한 6월 23일에는 문묘(文廟)에서 출향(黜享)되었던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을 다시 배향(配享)했다(『숙종실록』 20년 6월 23일).

한편 고변자(告變者)의 처리를 둘러싸고 옹호하는 측과 엄벌하자는 측 사이에 논쟁이 벌어졌다. 이때 논쟁의 주요 쟁점은 정찰(偵察) 행위의 정당성 여부와 중궁 복위 주체 문제였다. 먼저 남구만은 김춘택·한중혁 등이 행한 정찰의 정당성 문제를 비판하고 나섰다. 그들이 행한 정찰은 민심을 미혹하고 세도(世道)를 손상시키는 일로 공론(公論)의 배척을 받아 마땅한 일이라고 주장했다(『숙종실록』 20년 7월 4일). 나아가 경신환국 당시 김석주의 정찰 행위에 대해서도 서인을 보호한 결과는 인정하지만 그 방식에 대해서는 부정했다.

또한 중궁 복위의 주체 문제에 있어서 남구만은 김춘택 등의 공로를 부인하고 도리어 이들을 신문하고 처형할 것을 요청했다. 즉 중궁의 복위는 숙종의 결단으로 이루어지는 것이지 김춘택·한중혁 무리가 도모할 수도 도모해서도 안 되는 일이라고 강조했다. 반면에 숙종은 김춘택 등의 행위는 모역(謀逆)이라기보다는 폐비를 위한 것이라고 옹호하기도 했다.

한편 숙종은 윤지완의 요청을 받아들여 "폐비를 변명·구원하는 자를 역률로 처벌하겠다."는 지시를 거두어들이고, 인현왕후의 처소를 별궁인 의궁(義宮)으로 했다가 다시 경복당(慶福堂)으로 옮겼다. 마침내 4월 12일 인현왕후를 입궁(入宮)시키고 책례(冊禮)를 거행했으며, 인현왕후와 함께 궁에서 쫓겨났던 숙종의 후궁 귀인김씨도 복작(復爵)되었다.

한편 조정에서 논의하여 장씨(張氏)의 작호(爵號)를 고치자는 것에 남구만은 "아들과 신하가 어머니와 임금을 의논하는 결과"라고 하며 반대했다. 또한 희빈(禧嬪)으로 작호를 강등하는 것에 대해서는 중전의 복위로 인한 것이지 죄가 있어서 쫓겨나는 것이 아니므로, ‘승출(昇黜)’을 ‘승강(昇降)’으로 용어를 바꾸어야 한다고 주장했다(『숙종실록』 20년 4월 17일). 결국 장씨의 작호는 희빈으로 환원되고, 보인(寶印)은 부수어 파묻었으나, 세자의 문안(問安)은 폐하지 않도록 했다.

참고문헌

  • 『추안급국안(推案及鞫案)』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이성무·정만조 외, 『조선 후기 당쟁의 종합적 검토』,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2.
  • 이은순, 『조선 후기 당쟁사 연구』, 일조각, 1988.
  • 이희환, 『조선 후기 당쟁 연구』, 국학자료원, 1995.
  • 정석종, 『조선 후기 사회 변동 연구』, 일조각, 1983.
  • 정경희, 「숙종대 탕평론과 ‘탕평’의 시도」, 『한국사론』30, 19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