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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0:57 기준 최신판



조선시대에 궁궐에서 특별한 불사(佛事)를 맡기기 위해 임시로 기용한 승려.

개설

차비승(差備僧)은 궁궐이나 관청에서 기신재(忌晨齋)수륙재(水陸齋) 같은 국가적인 성격의 불교 행사를 개최할 때 임시로 소임을 맡긴 승려를 말한다. 조선전기부터 출가가 엄격히 통제되고, 왕실의 불사를 전담하는 사찰 승려의 수가 급격히 줄어든 까닭에 차비승이 생겨나게 되었다.

담당 직무와 내용

차비승의 존재는 조선시대의 불교 정책과 연관되어 있다. 조선은 국가 재정과 노동력을 확보하기 위해 건국 직후부터 출가를 통제하거나 사찰 소유의 재산을 국고로 환수하는 등 불교계 전반에 걸쳐 억불 정책을 시행하였다. 특히 성종과 중종 연간에는 출가를 원천적으로 금지하고, 도첩(度牒)이 없는 승려를 처벌하고 환속시키기 위해 사찰을 수색하기도 하였다.

차비승은 이러한 억불 정책의 영향으로 공인된 승려의 수가 감소하면서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또한 조선초에 내원당에 머물면서 왕실의 불사를 전담하던 승려들을 모두 파직함에 따라 왕실에서는 불교 행사를 치를 때마다 외부의 승려들을 임시로 임명해 불사를 치르게 되었다.

1492년(성종 23)에 인수대비(仁粹大妃)와 인혜대비(仁惠大妃)는 언문으로 글을 내려, 승려가 되는 것을 금하는 법이 엄하여 승려가 모두 흩어진 까닭에 나라의 안녕과 민가나 왕실의 명복(冥福)을 비는 원당(願堂)을 수호할 수 없는 상황 등을 지적하였다. 즉 두 대비는 당시 불교계의 암울한 사정을 왕에게 알렸던 것인데, 승려가 없기 때문에 수륙재와 같은 의식을 치르지 못하나 다행히 임시로 고용한 차비승에게 맡기고 있을 뿐이라고 하였다(『성종실록』 23년 11월 21일).

한편 1516년(중종 11)에는 당시 왕실의 원당 사찰이던 봉선사(奉先寺)봉은사(奉恩寺)에서, 선왕(先王)의 명복을 비는 기신재를 지내기 위해 의식을 준비하고 진행할 수 있는 차비승을 보내 달라고 예조에 요청하였다(『중종실록』 11년 2월 22일). 그런데 이 문제를 두고 왕과 신하들 사이에 논쟁이 벌어졌다. 사간(司諫)유보(柳溥)는, 기신재는 하늘에 있는 조종(祖宗)의 신령으로 하여금 목욕하고 부처에게 절하게 하는 것이라며 철폐할 것을 주장하였다. 더욱이 당시는 도첩이 없는 승려를 색출하여 각종 부역에 동원하고 있던 때였다. 그러나 중종은 기신재는 이단을 숭상하는 것이 아니며, 조종이 설치한 것이므로 경솔히 혁파하기 어렵다며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결국 두 사찰에서 요청한 차비승은 예조에서 처리하여 보내도록 하였다.

참고문헌

  • 한우근, 『유교정치와 불교』, 일조각,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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