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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전설사(典設司)·풍저창(豊儲倉)·광흥창(廣興倉)·숭의전(崇義殿)의 장관과 종친부(宗親府)의 정·종4품 관직.

개설

수(守)는 세조 연간에 여러 관서에 설치되어 조선시대 말까지 운영되었다. 조선전기에는 종친부를 제외하면 전설사·풍저창·광흥창·숭의전의 장관으로 해당 관서의 정사를 총관하였고, 조선후기에는 종친부와 풍저창에만 존속하였다.

담당 직무

종친부의 수는 왕자군의 중증손(衆曾孫)이 제수되었으므로 담당 직무가 없었다. 전설사의 수는 정4품 제검(提檢) 이하의 관원을 거느리고 관서의 업무를 총관하였으며, 풍저창·광흥창의 수는 각각 호조의 지휘 아래 종6품 주부(主簿) 이하의 관원을 거느리고 해당 직무를 수행하였다. 숭의전의 수는 매년 봄과 가을에 고려를 창업한 태조(太祖)와 현종(顯宗)·문종(文宗)·원종(元宗)에게 올리는 제사를 주관하였다.

변천

조선 건국 직후인 1392년(태조 1) 7월에 관제를 제정할 때, 고려의 제도를 계승하여 풍저창과 광흥창에 각각 종5품 사(使)를 두면서 비롯되었다. 이후 1466년(세조 12) 1월에 『경국대전(經國大典)』을 편찬하는 과정에서 대대적으로 관제를 정비할 때, 정3품 당하관 이하의 잡다한 관직을 정(正) 이하로 통일한 조치에 따라 정4품 관직이 수로 규정되었다. 이때 풍저창과 광흥창의 사를 정4품 수로 승질·개칭하였으며, 1443년(세종 25) 이래로 왕자군의 중증손이 초임할 때 제수하던 종친부의 4품 영(令)을 정4품 수와 종4품 부수(副守)로 구분하고 개칭하였다. 또한 충호위가 승격된 전설사에 정4품 수를 두었고, 숭의전에는 처음에는 종3품 사를 비롯한 종3품 부사(副使)‧종5품 령‧종6품 감(監)을 두었다가 부사를 종4품 수로 개칭하였다. 이 네 관직 중 1직만 제수되어 숭의전의 제사를 주관하였고, 이에 따라 수가 제수될 때에는 수가 장관이 되어 제사를 주관하였다. 이 관제가 그대로 『경국대전』에 법제화되어 후대로 계승되었다. 이후 1746년(영조 22)에 편찬된 『속대전(續大典)』에 따르면, 전설사가 종6품 아문, 숭의전이 종5품 아문으로 각각 격하되고 풍저창이 혁파됨에 따라 이 세 관서의 수가 혁파되었다. 그 결과 수는 종친부와 풍저창에만 설치되었다가, 1894년(고종 31) 갑오개혁의 과정에서 관제를 근대식으로 개편할 때 당하관 이하의 모든 관직이 주사(主事)로 통합·개칭되면서 소멸되었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속대전(續大典)』
  • 『대전회통(大典會通)』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한충희, 『조선초기 정치제도와 정치』, 계명대학교출판부, 2006.
  • 한충희, 「정치구조의 정비와 정치기구」, 『한국사』 23, 1994.
  • 한충희, 「조선초기 육조속아문연구 2 - 관직의 정비를 중심으로」, 『계명사학』 12,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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