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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0:50 기준 최신판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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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원접사 |
한글표제 | 원접사 |
한자표제 | 遠接使 |
관련어 | 반송사(伴送使), 선위사(宣慰使), 영위사(迎慰使), 접반사(接伴使), 종사관(從事官), 천사(天使), 칙사(勅使) |
분야 | 정치/행정/관직·관품 |
유형 | 직역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 |
집필자 | 김송희 |
관품 | 정이품 이상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원접사(遠接使)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세종실록』 2년 5월 22일, 『태종실록』 9년 11월 15일, 『세종실록』 32년 윤1월 20일, 『세조실록』 2년 3월 19일, 『명종실록』 6년 5월 15일, 『광해군일기』 1년 1월 18일, 『중종실록』 28년 10월 18일, 『숙종실록』 15년 1월 28일, 『영조실록』 11년 10월 12일, 『영조실록』 33년 9월 9일 |
조선시대에 중국 사신을 국경에서 맞이하여 한양까지 접대·호송하던 임시 관직.
개설
조선은 중국과의 외교 관계를 중시하여 중국에 가는 사신뿐 아니라, 조선으로 오는 중국 사신의 접대에도 정성을 들였다. 조선시대의 중국 사신 접대 장소는 한양 밖과 안으로 나누어볼 수 있는데, 전자는 원접사(遠接使) 또는 접반사가, 후자는 영접도감의 관반이 지휘하였다.
원접사는 국경에서 처음으로 칙사를 맞이하는 접대 관원으로서, 체류 기간이나 돌아가는 여정에도 간여하므로 선발에 신중을 기하였다. 태종대 이후 조선말까지 정2품 이상으로 임명되었는데, 호란 이후의 대청(對淸) 관계에서는 대명(對明) 관계에서보다 덜 중시되었다.
담당 직무
중국의 공식 문서인 패문(牌文)이나, 중국에 갔다가 돌아오는 사신 또는 풍문에 의해 칙사가 온다는 소식이 전해지면, 당일로 원접사가 선발되어 종사관 등 수행원을 거느리고 국경인 의주로 파견되어 칙사를 맞이하였다. 이후 한양에 도착할 때까지의 여정에서 각 지역 선위사·영위사와 지방관들을 지휘하며 사신 일행을 대접하며 호송하였다. 그리고 사신이 한양에 머무는 동안 각종 연회와 행사에 사신 일행과 함께 참석하였고, 대부분의 경우 사신이 돌아갈 때 국경까지 반송사로서 전송하였다. 이 과정에서 원접사는 사신에 대한 정보를 조정에 보고하고, 한편으로 사신과 조선 정부 사이의 마찰을 조정하였다.
조선초기에는 환관(宦官) 출신 사신이 대부분이어서 그들의 횡포를 막을 수 있는 풍채와 위엄을 갖춘 인물을 임명하였으나, 문관 출신 사신이 주로 왔던 성종대 이후에는 사신과의 문학적 교류가 중시되어 대제학 등 문장력이 있는 원접사를 파견하였고, 수행원도 시문(詩文)을 잘 짓는 관원을 스스로 뽑아가게 하였다. 그 밖에 원접사는 직무를 수행하는 도중에서 보고 들은 민정 자료를 왕에게 전달하는 역할도 하였다(『세종실록』 2년 5월 22일).
변천
고려후기에서 조선 태조대까지는 접반사로 부르다가, 태종 초에 원접사로 바꾸었고, 점차 칙서를 가져오는 칙사는 정2품 이상의 원접사가, 그 밖의 사신은 종2품의 접반사가 맞이하도록 되었다. 정1품 의정은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조선초기에는 환관 출신 사신들이 대부분이어서 그들의 행패를 무마할 수 있는 원접사가 주로 파견되었다(『태종실록』 9년 11월 15일). 세종대 이전에는 원접사가 한양에 들어온 후 그대로 관반이 되어 접대 업무를 총괄하는 것이 전례였으나(『세종실록』 32년 윤1월 20일), 점차 따로 임명하게 되었고, 1456년(세조 2) 이후 원접사를 도울 종사관을 파견하기 시작하였다(『세조실록』 2년 3월 19일).
성종대 이후 문장이 뛰어난 인물들이 명의 사신으로 오면서, 이에 대응할 수 있는 인물을 원접사로 삼고자 하였으나 자질을 갖춘 인물이 많지 않고 연이어 임명하기도 곤란하였다. 일단 대제학이 원접사가 되는 것이 관례화되었고(『명종실록』 6년 5월 15일), 비록 종2품이라도 문장이 뛰어나면 일시적으로 정2품의 임시 직함을 주는 경우도 생겼다. 원접사에게 갑자기 탈이 생길 경우를 대비해서 의주영위사는 문장이 뛰어난 인물로 임명하였고(『광해군일기』 1년 1월 18일), 종사관 등 시문에 뛰어난 수행원을 보강하기도 하였다(『중종실록』 28년 10월 18일).
임진왜란 이후 연이은 사신과 그에 대한 접대 행렬로 국고에 부담이 가고 백성들이 곤궁에 처하자, 원접사의 수행원을 줄이고 폐단을 방지하려는 조처가 행해지기도 하였다. 호란 이후 명(明) 대신 청(淸)의 사신이 오기 시작하면서, 조정의 반청 감정으로 인하여 원접사는 점차 관직에서 물러나있거나 왕에게 미움을 받는 관원들이 임명되기 시작하였고(『숙종실록』 15년 1월 28일) , 원접사와 반송사가 분리 임명되는 경우가 많아졌으며, 전후 사신의 원접사와 반송사를 겹쳐서 교차 임명하기도 하였고(『영조실록』 11년 10월 12일), 사신을 접대하는 각종 연향도 정지되는 경우가 생겼다(『영조실록』 33년 9월 9일). 그러나 개항 이후인 1890년(고종 27)까지도 원접사는 계속 임명되었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대전회통(大典會通)』
-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
- 『통문관지(通文館志)』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