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토장(莎土匠)"의 두 판 사이의 차이
(XML 가져오기) |
(차이 없음)
|
2017년 12월 10일 (일) 00:49 기준 최신판
주요 정보 | |
---|---|
대표표제 | 사토장 |
한글표제 | 사토장 |
한자표제 | 莎土匠 |
상위어 | 경공장(京工匠), 공장(工匠), 관장(官匠), 사장(私匠), 외공장(外工匠), 장공인(匠工人), 장인(匠人) |
동의어 | 사초장(莎草匠) |
분야 | 정치/행정/관속 |
유형 | 직역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 |
왕대 | 조선 |
집필자 | 장경희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사토장(莎土匠)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광해군일기』 1년 2월 4일, 『영조실록』 44년 3월 21일, 『중종실록』 32년 4월 23일, 『광해군일기』 1년 2월 4일 |
묘소를 만들 때 봉분을 조성하거나 뗏장을 입히는 일을 업으로 하는 장인.
개설
조선시대에 왕릉을 비롯한 무덤에 봉분을 쌓거나 묘소 주위를 돋우거나 떼를 입히는 등의 능역(陵役)을 하는 장인을 사토장(莎土匠)·사초장(莎草匠)이라고 불렀다. 조선시대에는 신분의 고하에 따라 무덤을 능(陵)·원(園)·묘(墓)로 구분하였다. 이러한 능·원·묘를 조성할 때마다 조정에서는 재력과 물력을 총동원하기 위해 산릉도감(山陵都監)·원소도감(園所都監)·묘소도감(墓所都監)이라는 임시 기구를 설치 운영하였다. 사토장은 도감에서 작업해야 할 것 가운데 봉분을 조성하기 위해 설치한 삼물소(三物所)와 흙을 돋우고 뗏장을 입히기 위한 보토소(補土所)에 소속되어 있었다.
담당 직무
사토장은 조선시대에 능·원·묘를 조영하거나 수개(修改)하는 도감의 삼물소나 보토소에 소속되어 크게 세 가지 신역(身役)을 했다.
첫째, 능묘를 조영하는 산릉·원소·묘소도감의 삼물소에 동원된 사토장은 주검칸[玄室]을 조성하는 일을 하였다. 사토장은 모군(募軍)과 함께 병풍석 안에 유회(油灰)를 채우고 절구질하고, 만석(滿石) 위에는 황토(黃土)를 채우고 원달구질을 해서 다졌다. 이처럼 발로 밟고 달구질을 하면서 삼물을 사용하여 바르면 흙이 굳으면서 돌처럼 견고하게 다져져 송곳도 들어갈 수 없을 정도로 단단해져 형태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광해군일기』 1년 2월 4일).
둘째, 보토소에 차출된 사토장이나 사초장은 능 주위를 돋우고 잔디를 덮는 일을 담당하였다.
셋째, 무덤을 증개축하는 수개도감에 사토장이나 사초장이 동원되었다. 능묘는 조성한 후 세월이 지나 홍수 등에 의해 봉분의 흙이 씻겨 내려가 그 높이가 낮아지면 수개도감을 세우거나 왕이 왕릉에 친행을 하기 전에 사토장으로 하여금 흙을 보충하고 뗏장[莎草]을 보충하게 하였다(『영조실록』 44년 3월 21일). 조선후기에는 사토장이 사초를 보충하는 일을 하면 사초장이라고도 불렀다.
변천
사토장은 조선시대에 왕이나 왕비의 사후 왕릉을 조성할 때 산릉도감에서 봉분에 흙을 돋우는 역할을 하였다. 가장 이른 사례는 중중대에 계비인 장경왕후(章敬王后)의 희릉(禧陵)을 조성할 때에 혈(穴) 자리에 돌이 있다고 하여 능을 옮기는 문제를 의논할 때 처음 보인다(『중종실록』 32년 4월 23일). 이후 조선후기에도 산릉도감이나 산릉수개도감에 차출되어 절굿공이로 다지고 밟아 흙을 단단하게 만드는 역할을 하였다(『광해군일기』 1년 2월 4일).
조선후기에는 왕릉뿐 아니라 원소 및 묘소 등의 왕실 무덤을 조영하거나 수개하던 도감마다 사토장이 소속되어 있었다. 이들 사토장의 처지는 능원묘의 영건이나 수개 관련 도감에 설치된 각 소의 성격과 시기에 따라 인원수에 변화가 있었다. 곧 17세기에는 삼물소가 대부분이고, 1659년 효종의 영릉을 조영할 때에만 보토소를 설치하였을 뿐이었다. 17세기 초인 1649년 인조장릉이나 1659년 효종영릉을 조성할 때에 산릉도감의 삼물소에 사토장을 각각 10명씩 차출하였다.
17세기 말 이후 사토장은 왕실의 상장례를 주관하는 귀후서(歸厚署)에 소속되기도 하였는데, 1744년 명릉을 수개할 당시 사토장이 관장(官匠)으로 차출되었다.
18세기 중반까지 산릉도감은 여전히 삼물소 위주로 운영되다가 1757년에 정성왕후의 원릉을 조성한 이후 산릉도감에 삼물소와 보토소를 설치 운영하는 것이 정례화되었다.
19세기에 들어서도 산릉도감에 삼물소와 보토소를 설치하였다. 이때 삼물소에는 사토장을, 보토소에는 사초장을 동원하는 것이 관례였다. 19세기 초에는 산릉도감의 삼물소와 보토소에 소속된 사토장의 숫자는 각각 20명 내외로 비슷하였다. 그러나 당시 천릉도감이나 개수도감에서는 봉분을 조영하는 삼물소보다 뗏장을 입히는 보토소의 비중이 높아져 사토장보다 사초장의 인원수도 1.5배에서 2배 정도 많았다. 예컨대 1816년 현륭원을 천원하는 원소도감 이후 삼물소에는 8명의 사토장을 동원한 데 비해 보토소에는 15명의 사초장이 활동하였다, 이로 미루어 도감의 성격에 따라 삼물소의 사토장과 보토소의 사초장으로 구분하여 차출되지만 막상 중복하여 동원되어 기능상으로 크게 다르지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1897년 대한제국시대에 들어 왕릉 대신 황제릉으로 조영하면서 능의 규모가 커져서 동원되는 사토장의 숫자도 늘었다. 가장 규모가 컸던 1898년 명성황후의 홍릉 산릉도감에는 사토장 84명이 동원되었고, 1904년 순명황태자비의 유강원(裕康園) 원소도감(園所都監)에는 사토장 35명이 동원된 것에서 이를 알 수 있다. 아울러 당시 사토장과 사초장은 차출된 도감의 성격이나 수행 역할에 따라 혼용되었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장경희, 『의궤 속 조선의 장인』, 솔과학, 2013.
- 장경희, 「조선 후기 산릉도감의 장인 연구」, 『역사민속학』 25호,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