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장(銅匠)"의 두 판 사이의 차이
(XML 가져오기) |
(차이 없음)
|
2017년 12월 10일 (일) 00:48 기준 최신판
주요 정보 | |
---|---|
대표표제 | 동장 |
한글표제 | 동장 |
한자표제 | 銅匠 |
상위어 | 경공장(京工匠), 공장(工匠), 관장(官匠), 백공(百工), 사장(私匠), 장공인(匠工人), 장인(匠人) |
동의어 | 유동장(鍮銅匠) |
관련어 | 유장(鍮匠), 주종장(鑄鐘匠) |
분야 | 정치/행정/관속 |
유형 | 직역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고려, 조선 |
왕대 | 고려, 조선 |
집필자 | 장경희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동장(銅匠)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세종실록』 12년 8월 17일, 『세조실록』 9년 5월 29일, 『세종실록』 12년 8월 21일, 『세종실록』 16년 6월 11일 |
중앙의 관부에 소속되어 구리로 그릇을 만드는 장인.
개설
동장(銅匠)은 속칭 퉁장이다. 퉁은 동으로 만든 그릇의 속칭으로, 흑연(黑鉛)과 적동(赤銅)을 녹여서 만든 것이다. 고려시대에는 장인들을 각 출신 지역별로 파악하여 공장안(工匠案)·백공안독(百工案牘)을 작성하였으며, 일반 양인과 거의 마찬가지 신분으로 일률화되었다.
조선초기에는 국방용 무기 제조를 위해 병조와 군기감(軍器監)에는 동장 4명을 소속시켰으나, 국가가 안정되면서 점차 왕실용 사치품의 제작이 늘면서 『경국대전(經國大典)』에 의하면 동장은 공조(工曹)·상의원(尙衣院)에 각각 4명씩 소속되도록 규정되어 있었다. 조선후기 『대전통편(大典通編)』, 『대전회통(大典會通)』 등의 법전에서는 이러한 규정이 달라지지 않았지만, 이미 사문화되어 있었다. 18세기에는 동장은 상의원·내수사(內需司)의 관장(官匠)이거나 훈련도감(訓鍊都監) 등 군문에 소속된 장인으로서 대개 4∼6명이 짝을 이루어 도감에 차출되었다. 18세기 중엽 이후 동장은 모두 사장으로 전환되어 사적 생산에 종사하였고, 19세기에는 도감마다 5∼6명씩 동원하였다.
한편 조선시대 불교 사찰에서는 고려시대와 마찬가지로 각종 범종을 만들었는데, 이때 화승(畵僧)·화사(畵師)와 함께 주종장(鑄鐘匠)을 두어 제작하였다.
담당 직무
동장의 작업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 구리를 녹여 왕실의 일상용 그릇을 만드는 것이다. 구리 밥그릇[銅盂]이나 놋밥그릇[鍮鉢]을 만들었다(『세종실록』 12년 8월 17일). 군기감에서 총통(銃筒) 600여 개를 훔쳐 놋그릇과 구리 그릇을 만들기도 하였다(『세조실록』 9년 5월 29일).
둘째, 왕실의 의례 행사 때 필요한 공예품을 만드는 일을 하였다. 중국 사신을 맞이하기 위한 영접도감 때 사용한 주봉배(晝奉盃)를 만들었다(『세종실록』 12년 8월 21일).
변천
구리를 다루는 장인은 청동기시대부터 존재하여 청동제 거울이나 동검 등을 만드는 일을 하였을 것이다. 이들 기술자들은 국가의 지배 계층을 형성하여 성장하였다.
조선초기에 국방을 위해 각종 무기의 수요가 증가하였다. 이에 병조와 군기감에는 소속된 동장 2명을 4명으로 늘리도록 요청하였다(『세종실록』 16년 6월 11일). 그러나 이후 국방보다는 왕실의 의례용품이나 일상품의 비중이 커지면서 성종 때 편찬된 『경국대전』을 보면 동장은 공조와 상의원에 각각 4명씩 소속되도록 규정되어 있었다. 이들 동장의 처치는 조선후기 『대전통편』, 『대전회통』 등의 법전에서도 여전히 공조와 상의원 소속에 각각 4명씩으로 달라지지 않았다.
조선후기 왕실의 행사 때마다 설치 운영된 도감마다 구리로 각종 의물(儀物)을 만드는 동장을 차출하였다. 1604년 선조의 재존호도감(再尊號都監)을 비롯하여 왕실의 가례와 관련해서는 가례도감(嘉禮都監)·책례도감(冊禮都監)·존숭도감(尊崇都監)에, 왕실의 흉례와 관련해서는 국장도감(國葬都監)·부묘도감(祔廟都監)에, 길례와 관련해서는 제기악기도감(祭器樂器都監)·영녕전개수도감(永寧殿改修都監)에, 어용도사도감(御用都事都監)·금보개조도감(金寶改造都監) 등에 동장을 차출하였다.
이렇게 조선후기 도감에 동원된 동장의 처지, 인원수 및 직역은 시기에 따라 변천하였다. 우선 17세기에는 도감마다 대개 2∼3명의 동장이 징발되었는데, 이들 특정 장인들은 서울에 거주하는 경공장(京工匠)으로서 무리를 지어 20∼30년간 함께 활동하였다. 17세기 초 도감에서 동장 정계남(鄭繼男)이 가장 이른 시기부터 징발되었다. 그 이후 정씨는 전문적인 동장 집안을 이루어 18세기까지 지속적으로 도감역(都監役)을 졌다.
18세기 들어 동장은 상의원·내수사의 관장(官匠)이거나 훈련도감 등 군문에 소속된 장인으로서 대개 4∼6명이 짝을 이루어 도감에 차출되었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대전통편(大典通編)』
- 『대전회통(大典會通)』
- 장경희, 『의궤 속 장인』, 솔과학, 2013.
- 서성호, 「고려 전기 지배체제와 공장」, 『한국사론』 27, 1992.
- 이광배, 「고려시대 범종의 발원계층과 주종장인」, 『동악미술사학』 13, 2012.
- 장경희, 「조선후기 왕실제기 주성 유기장 연구」, 『한국공예논총』 11-2호, 2008.
- 최응천, 「고려시대 금속공예의 장인」, 『미술사학연구』 24, 2004.
- 홍승기, 「고려시대의 공장」, 『진단학보』 40, 1975.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