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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0:46 기준 최신판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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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대정 |
한글표제 | 대정 |
한자표제 | 隊正 |
관련어 | 여수(旅帥), 오장(伍長) |
분야 | 정치/행정/관직·관품 |
유형 | 직역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 시대 |
왕대 | 조선 시대 |
집필자 | 윤훈표 |
관품 | 잡직(雜織) 종구품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대정(隊正)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태종실록』 7년 9월 1일, 『문종실록』 즉위년 8월 6일, 『문종실록』 1년 6월 19일, 『세조실록』 5년 11월 1일 |
조선시대 군대를 편성하는 단위였던 대(隊)의 지휘자.
개설
고려에서는 25명의 군사로 편성된 대라는 단위 부대의 장(長)이었다. 조선에 들어와 초창기에는 외방 토관의 서반직에서 그대로 사용하였다. 문종 때 5위 진법을 수용하면서 부대의 하부 편성으로 25명을 1대로 하고 그 장을 대정(隊正)이라고 명명했다. 이것을 기반으로 부대 조직과 전투 편성의 일체화를 추진하였다. 세조 때 5위제로의 개편과 함께 의무적으로 번상해야 했던 정병 조직을 일원화시켰다. 그리고 5위 진법에 따라 대정을 하급 지휘자로 규정했다. 하지만 양란 이후 5위제가 마비되면서 잡직(雜織) 종9품으로 정해졌다.
담당 직무
대정은 고려에서 군사 25명으로 편성된 대라는 단위 부대의 장이었다. 조선에 들어와 초창기에는 지방 통제와 군사적 방어 조직의 강화를 위해 편제한 특수 지방관제인 토관의 서반 관직명으로 활용되었다. 1407년(태종 7)에 영흥부(永興府)의 토관수를 감축하면서 서반(西班)진북위(鎭北衛) 1령(領)·2령·3령에 각각 대장(隊長) 5명, 대정 15명, 권지대정(權知隊正) 15명으로 정했는데, 이는 전에 비해 54명을 줄인 것이라고 했던 것이 대표적 사례였다(『태종실록』 7년 9월 1일). 이를 통해 외방에서는 고려식 제도의 흔적이 남아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곧 이마저 조선식으로 바뀌면서 사라졌다.
그런데 문종 때 5위 진법을 도입하면서 부대의 하부 편성으로 군사 5명을 1오(伍)로, 25명을 1대로, 125명을 1려(旅)로 구성하는 방도가 마련되었다. 이를 통해 부대 조직과 전투 편성이 하나로 합쳐지도록 조치하고자 했다. 드디어 제위(諸衛)의 군사는 매 5명마다 오장(伍長)을, 10명마다 십장(什長), 25명마다 대정을 두어서 각기 그 소속 인원을 거느리되, 만약 군율(軍律)을 어긴 자가 있으면 범한 자와 그 대의 장을 처벌하도록 했다(『문종실록』 즉위년 8월 6일). 그리고 정식으로 『신진법(新陣法)』을 공포하면서 여수(旅帥)는 대정을, 대정은 오장을, 오장은 그 사졸을 호령하도록 했다(『문종실록』 1년 6월 19일). 이로써 명령 체계가 체계화되었다.
세조 때에 들어와 5위 진법에 의거하여 중앙군 조직을 5위제로 개편하면서 외방에서 의무적으로 번상하는 병종의 일원화를 시도하였다. 지금까지 함경도와 강원도 일부 지역인 동계와 평안도 지역인 서계의 그것을 정군(正軍), 나머지 도의 경우에는 시위패(侍衛牌)라고 했는데, 이를 정기병(正騎兵)과 정보병(正步兵)으로 통일시켰다. 이를 계기로 매 25명마다 대정 1명을 두고, 125명마다 여수 1명을 두게 하는데, 각도의 도절제사(都節制使)로 하여금 시험해 뽑아서 보고하면 그 직을 제수하도록 했다(『세조실록』 5년 11월 1일). 이것으로 부대 조직과 전투 편성의 일원화가 실현되었다.
변천
『경국대전』에서는 정병의 여수와 대정을 수도에서는 병조, 지방에서는 병마절도사가 시험을 보여 뽑으며 한 가지 재주에 합격한 자에게 모두 『진법』을 강론시켜서 실력이 조(粗) 이상의 성적을 얻으면 임금에게 보고하여 임명하도록 하였다. 당시 시험 평가는 매우 흡족한 성적을 내면 통(通), 그럭저럭 내용을 채웠으면 약(略), 요건에 미흡하면 조(粗), 형편없으면 불(不)로 평가하였다. 30개월이 차면 모두 근무 성적을 평가해서 관계(官階)를 올려주거나 교체하도록 했다. 다만 제주도에서는 절제사(節制使)가 선발하도록 했다. 시험 과목은 나무 화살로 거리가 180보(步) 떨어진 표적에 1발 이상 득점해야 했다. 말을 타고서 활을 쏘는 기사(騎射) 시험에서는 2발 이상 적중해야 했다. 말을 타고 달리면서 창을 던지는 기창(騎槍) 평가에서는 1발 이상 적중해야 했다.
그러나 양란 이후 5위제가 사실상 마비되면서 대정도 조선전기 때와 같은 기능을 수행하기 어렵게 되었다. 이로 인해 『속대전』에서는 기보병(騎步兵)의 잡직 종9품으로 정해졌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속대전(續大典)』
- 민현구, 『조선초기의 군사제도와 정치』, 한국연구원, 1983.
- 윤훈표, 「5위체제의 성립과 중앙군」, 『한국군사사 5 조선전기Ⅰ』, 육군본부,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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