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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체의 운행과 위치를 관측하던 천문의기(天文儀器)인 혼천의(渾天儀)의 일종.

개설

선기옥형(璿璣玉衡)은 『상서(尙書)』「요전(堯典)」의 “선기옥형으로 칠정(七政)을 가지런히 한다.” 하는 대목에서 나온 말이다. 사마천의 『사기(史記)』「오제본기(五帝本紀)」에는 요(堯)임금이 연로하자, 다음 대 왕이 되는 순(舜)에게 자신을 대신하여 섭정하여 천명을 살필 것을 명하였다. 이에 순은 선기옥형으로 칠정을 가지런히 다스려, 마침내 상제에게 유제(類祭)를 지냈고, 육종에 인제(禋祭)를 지냈으며, 산천에 망사(望祀)하였고, 뭇 신을 변사(辯祀)하였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때 선기옥형이 무엇인가에 대한 해석은 크게 네 갈래로 갈라진다. 첫째는 『사기』「천관서(天官書)」에 보이는 것으로, 북두칠성으로 해석하는 경우이다. 옥형(玉衡)은 옥으로 만든 저울대란 뜻인데, 북두칠성이 해·달·금성·목성·수성·화성·토성인 칠요(七曜)의 운행을 표상한다는 의미이다. 둘째는 『주비산경(周髀算經)』 등에서 보이는 해석으로 선기(璿璣)를 선회한다는 뜻의 선기(璇璣)와 같다고 보고, 모든 별들의 회전축이 되는 북극성을 일컫는다는 것이다. 셋째는 이 두 견해를 절충하는 경우로, 선기는 북극성을, 옥형은 북두칠성을 지칭한다는 것이다. 넷째는 전한시대에 비약적으로 발달한 천문학의 성과에 힘입은 경향으로, 선기옥형은 별자리가 아니라 천문 관측 의기인 ‘혼천의’ 자체를 지칭한다는 해석이다. 조선시대 천문의기와 관련해서는 당연하게도 이 마지막 관점으로 주로 인식되었다.

칠정이 일월과 오행성에 대한 칠요의 관측을 지칭하므로 선기옥형이란 결국 천체 운행을 관측하는 일종의 천문의기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이런 이유로 선기옥형은 천체 관측과 관련하여 널리 쓰이는 이름이 되었으며, 세종대에는 소형 혼천의를 만들고 선기옥형이란 이름을 붙였다. 선기옥형은 구형(球形)의 겉면에 일월성신 등의 천상(天像)이 그려져 있다. 이 선기옥형을 사각(四脚)의 틀 위에 올려놓고 회전시키면서 천체의 위치를 적도 좌표로 측정하는 데 사용하였다.

연원 및 변천

『조선왕조실록』에 보이는 선기옥형의 인식을 살펴보면, 1418년(세종 즉위) 10월 18일 기사에, 왕인 세종과 상왕인 태종이 명나라에 보내는 정조(正朝) 하표전(賀表箋)에 백관과 함께 황제에게 정성을 바치는 절을 하는 장면이 수록되어 있다. 이 표전의 내용 가운데에는 중국 황제에 대해 “선기옥형의 칠정을 살피어 문(文)을 닦고 무(武)를 절제하여 문물제도를 온 세상[八荒]에 펴셨습니다.” 하는 내용이 있다. 여기서 중국은 하늘이 직접 보살피는 나라여서 천자가 천체 운행의 요체인 칠정을 선기옥형으로 관측하여 늘 바로잡는다는 의미를 강조하고 있다.

1433년(세종 15)에도 선기옥형에 대한 기사가 있다. 세종은 예로부터 제왕은 다 역상(曆象)을 중요하게 여겼다고 하면서 요임금은 희씨(羲氏)와 화씨(和氏)에게 명하여 백공을 다스렸고, 순임금은 선기옥형에 의거하여 칠정을 고르게 하였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자신이 간의(簡儀) 제작을 명하여, 경회루 북쪽 담 안에다가 대(臺)를 쌓고 간의를 설치하게 하였다고 했다. 이어서 사복시(司僕寺) 문 안에다가 집을 짓고 서운관에서 돌아가며 숙직하면서 기상을 관측하게 했으면 하는데 다른 신하들의 의견은 어떠한지 물었다. 그러자 영의정황희와 좌의정맹사성 등은 네다섯 칸 집으로 짓는 것이 좋겠다고 대답하였다(『세종실록』 15년 7월 21일). 1434년(세종 16)에는 김빈(金鑌)에게 보루각(報漏閣) 누기(漏器)에 대한 명(銘)서(序)를 짓게 하였다(『세종실록』 16년 7월 1일). 이를 보면, 천지 운행을 측정하는 의상(儀象)과 밤낮의 한계를 표준하는 해시계와 물시계인 구루(晷漏)가 천문 관측의기의 요체라고 하였다. 또한 왕은 요임금의 하늘 공경하는 마음과 순임금의 선기옥형 만든 뜻을 본받아 의상을 제작하여 측후의 근거를 삼았다고 하였다. 여기에 궁궐 안 서쪽에는 세 칸 건물의 보루각을 건립하고서 호군장영실에게 명하여 새로운 물시계를 안치하고, 시간을 맡는 목인(木人) 3신과 12신을 만들어 닭과 사람의 직책을 대신하게 하였다고 찬탄하였다.

1548년(명종 3)에는 왕이 『서전(書傳)』 강학에 필요한 선기옥형과 혼천의를 만들도록 하였다(『명종실록』 3년 10월 19일). 이에 따라 이듬해인 1549년 1월 2일, 홍문관이 선기옥형과 혼천의의 제도(制度)를 올렸다. 1628년(인조 6) 11월 1일에는 왕이 『서전』 강학 중에 선기옥형이 무엇인가를 물었는데, 부제학 정경세(鄭經世)는 자신도 서생(書生) 때부터 연구했으나 아직까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면서 그 어려움을 토로하였다.

효종 때에는 홍문관에서 민간의 천문의기를 모방해 천문 관측 기구를 만들자고 건의하였다. 홍문관은 지난해 선기옥형을 만들라는 하교로 그때 강관홍처윤(洪處尹)이 선기옥형을 만들어 올렸다고 하였다. 이어서 지금 김제군수최유지(崔攸之)가 기형(璣衡) 하나를 만들었는데, 물을 사용하여 스스로 작동하고 해와 달의 운행 도수와 시각의 흐름이 조금의 오차도 없어서 본 사람은 모두 정밀하고 완벽하다고 말하였다 하였다. 그러면서 그 기계를 서울의 집에 두었다고 하니, 그가 임지로 떠나기 전에 관상감에게 명하여 천문을 이해하는 자 한 사람을 선발하여 가서 만드는 법을 배우게 하고, 아울러 상방(尙方)의 솜씨 좋은 목공을 선발하여 그 제도를 모방하여 일구를 본관에 보관하게 하기를 요청하였다(『효종실록』 8년 5월 26일).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조선전기에 구축된 천문의기 전통이 단절된 면을 잘 보여준다. 관상감이 오히려 민간의 관측 기기를 모방하는 지경에 이르렀던 것이다.

영조 때에는 순전(舜典)을 강론하는 주강(晝講)에서 왕이 선기옥형에 대해 물었다. 지경연사(知經筵事)김동필(金東弼)은, 순임금은 옥형을 살펴 칠정의 운행을 가지런히 하였으며, 세종은 간의대를 설치하고 흠경각(欽敬閣)과 보루각을 세웠다고 하였다. 또한 숙종은 제정각(齊政閣)을 설치하고 선기옥형을 안치하여 공경하는 도리를 다하였다고 대답하였다(『영조실록』 4년 2월 18일). 이것은 순임금의 선기옥형을 천체 관측 기구인 혼천의로 해석하고, 세종 때 제작한 간의대와 흠경각의 옥루, 보루각의 자격루, 숙종 때의 제정각에 설치한 혼의 등을 모두 선기옥형의 전통으로 간주한 것이다.

형태

혼천의는 관성대(觀星臺)를 세운 원나라 곽수경법(郭守敬法)에 의거하여 육합의(六合儀), 삼신의(三辰儀), 사유의(四游儀)로 구성된다. 이 중 적도환, 백각환, 사유환이라는 이름의 3개 고리와 관측 가늠대인 규형만을 따로 떼 내어 간소화한 것이 간의이다. 간의는 천체의 적경과 적위, 고도와 방위를 적도 좌표계와 지평 좌표계로 변형하여 간명하게 측정하도록 한 것이다. 주천(周天)을 365.25°로 표시한 적도환은 칠정의 외관 입수 도분을 측정하고, 이 적도환 안쪽에는 하루 12시 100각을 표시한 백각환으로 해 그림자의 시각을 재며, 밤에는 중성 별자리를 정하는 기능을 한다.

참고문헌

  • 『사기(史記)』 「천관서(天官書)」
  • 『한서(漢書)』 「예문지(藝文志)」
  • 『한서(漢書)』 「천문지(天文志)」
  • 『여씨춘추(呂氏春秋)』
  • 『회남자(淮南子)』
  • 『천문류초(天文類抄)』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 김일권, 『(동양 천문사상) 하늘의 역사』, 예문서원, 2007.
  • 김일권, 『고구려 별자리와 신화: 고구려 하늘에 새긴 천공의 유토피아』, 사계절, 2008.
  • 김일권, 『우리 역사의 하늘과 별자리: 고대부터 조선까지 한국 별자리와 천문 문화사』, 고즈윈,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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