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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9일 (토) 23:14 기준 최신판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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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단대봉 |
한글표제 | 단대봉 |
한자표제 | 單代捧 |
상위어 | 환곡(還穀) |
관련어 | 대봉(代捧), 작전납(作錢納) |
분야 | 경제/재정/환곡 |
유형 | 법제·정책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 |
왕대 | 숙종~고종 |
집필자 | 양진석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단대봉(單代捧) |
재해를 당하여 환곡으로 나누어 준 곡물을 거두어들이기 힘든 상황에 처하였을 때, 곡물들 간의 상대적인 교환비율을 적용하지 않고 거두어들이는 방식.
개설
대봉이란 원래 나누어 준 곡물의 작황이 매우 열악하거나 혹은 그 지역에서 생산되지 않는 곡물로서 다른 지역으로부터 이전되어 온 곡물이라든지, 동일한 곡물로 갚지 못하게 된 사정이 발생하였을 때, 곡물 상호간에 상대적인 교환비율을 적용하여 거두어들이는 것을 뜻하였다. 이에 비하여 단대봉은 원래의 곡물[正穀]을 대신하면서 곡물 상호간에 적용되던 상대비율이 아니라, 1대 1의 비율로 처리하여 거두어들이는 방식이었다. 단대봉은 곡물을 나누어 주고 거두어들이는 과정에서 담당자들이 농간을 부릴 여지가 많았다.
제정 경위 및 목적
원래 단대봉은 불법적인 방식으로 대봉의 형태를 변형한 것이었다. 환곡으로 이용되는 곡물들은 흔히 그것이 지닌 곡물가가 동일하지 않았다. 단대봉은 값이 다른 곡물들을 동일한 것으로 취급하고 동일한 양을 거두도록 한 것이다. 그 때문에 수령·이서들이 농간을 부릴 수 있는 여지가 매우 컸다. 이는 환곡이 크게 줄어드는 원인으로 작용하였다.
내용 및 변천
단대봉은 대봉의 변칙적인 형태였다. 『만기요람』에서는 대봉을 황두(黃豆) 1석으로써 쌀 1석을 대(代)하는 방식과 같은 것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관청에서 대봉할 때에는 원래 나누어 준 곡물과 같은 것이 아니라, 다른 곡물을 정해진 비율에 따라 대신 거둘 수 있게 하였다. 그리고 나누어 준 곡물이 아닌 거두어들인 곡물을 기록하게 하였다. 그러나 단대봉은 장부상으로 교환비율이 서로 다른 곡물들을 같은 비율로 처리하였다. 그 결과 환곡 장부에 기록된 곡물들의 명색이 섞이게 마련이었다. 이는 담당자들이 농간을 부릴 수 있는 방법으로 이용되었으며, 환곡의 감축을 초래할 수 있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영조대 이후 곡품의 품질과 곡물의 귀천(貴賤)을 따지지 않고, 석(石)을 단위로 대봉하는 사례들이 빈번하였다. 그리하여 곡물의 종류를 가리지 않고 양만 채웠으며, 다음해 가을에도 원래의 곡물의 종류로 바꾸어 놓지 않아서 고가의 곡물, 즉 환곡의 양이 줄어들고, 환곡 장부 또한 제대로 작성되지 않게 어지럽게 되고 있음이 자주 등장한다. 국가는 단대봉으로 인한 폐단이 점차 커지자, 단대봉을 행한 수령을 엄히 다스렸다.
대봉과 관련한 조항은 『속대전』 「호전」 창고조에서 찾을 수 있다. 대봉이 가능한 곡물들에 대하여 살펴보면, 미(米) 1석에 대해 황두 2석, 조(租) 2석 7두 5승, 소두(小豆) 1석 7두 5승을 대봉할 수 있었다. 소두 1석에 대해서는 황두 1석 4두, 속조(粟租) 1석 5두, 황두 1석에 대해서는 소두 11두 2승 5합, 속조 1석 3두, 조 1석에 대해서는 황두 12두로 대봉할 수 있었다. 반면 대미(大米)를 기준으로 소미(小米)를 상대(相代) 즉 1:1로 대봉할 수 있었으며, 다만 소미를 대미로 대봉할 때에는 모(耗)를 거두지 않도록 하였다. 그 외에도 상대할 수 있는 것은 직미(稷米)와 서미(黍米), 녹두(菉豆)와 소두, 직당(稷唐)과 황조(荒租), 진맥(眞麥)과 정조(正租) 간에 이루어지는 것이었다. 이와 같이 곡물 간에 상대비율이 정해져 있었지만, 이와 같은 형태를 제외하고 다른 곡물로 거두어들이면서 단대봉할 경우에는 불법적인 것으로 간주되었다.
대봉에 비해 단대봉은 불법적인 것으로 규정되었고, 그로 인한 폐해도 컸다. 단대봉의 문제는 대봉의 문제와 달리 곡물의 품질이나 종류를 가리지 않고 거두어들일 양만 채워 원래의 것으로 바꿔 놓지 않았으므로, 가격이 낮은 곡물을 비싼 곡물로 대체하여 피잡곡(皮雜穀)만 남게 되면서 실질적인 곡물의 감소를 가져왔다는 것이다. 그리고 다른 곡물을 장부에 기입하게 되어 원래의 명색과 나중의 명색이 달라져서 장부의 혼잡을 더하였다. 뿐만 아니라 이와 같은 행위로 말미암아 실제 창고에 곡물이 제대로 남아 있지 않은 것을 의미하는 환곡의 허류화(虛留化), 장부의 허부화(虛簿化)를 초래하였다. 단대봉은 수령들이 해당 고을 백성들로부터 칭송을 듣는 것에 급급하여 발생하는 경우도 없지 않았다. 관서의 강변지역의 여러 읍에서는 모두가 단대봉을 행하였을 정도였다.
단대봉의 폐단은 단순히 대봉의 문제에만 머물지 않았으며, 각종 폐단을 낳을 소지가 많았다. 각 고을에서 품질이 좋은 미곡을 이용한 후, 가격 혹은 품질이 낮은 곡물을 받아들여 환곡의 질을 떨어뜨렸으며, 양적인 면에서도 실질적인 감소가 나타나게 되었다. 결국 수령이나 이서들은 부족한 곡을 메우거나 원곡을 채우기 위해 나이(那移)·번질(反作)·요판(料販)·허록(虛錄) 등의 방법을 이용하기도 하였다. 단대봉에 머물지 않고 다른 형태의 방법들과 결합된 형태로 운영되었다.
18세기 대봉의 방식은 대곡(代穀)·대전(代錢)의 방식이 일반적이었다. 대봉은 환곡을 거두기 위한 임시방편적인 수단이었으며, 일정 기간이 되면 다시 원래의 곡물의 형태로 되돌려 놓아야 했다. 그러나 곡물의 관리가 이와 같이 의도한 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원래의 곡물로 바꾸어 놓지 않거나, 양을 제대로 채워 놓지 못하여 원래보다 곡물의 양이 줄어들었으며, 담당자들이 농간을 부릴 여지가 있었다. 이와 같은 대봉의 방식을 불법적인 방식으로 변형하여 운영한 것이 단대봉이었다. 단대봉은 곡물의 질과 상관없이 해당 곡물을 받아들인 것처럼 양을 채우기 위해 같은 비율로 고가의 곡물을 거두어들인 것으로 처리하여 등장하였으며, 곡물에만 적용되는 것에 머물지 않고 작전(作錢)의 방식과 결합되어 많은 폐해를 낳았다.
의의
단대봉은 수령과 이서들이 환곡을 이용하여 농간을 부리는 방법 중 하나로, 환곡장부의 허류화와 허부화를 초래하였으며, 환곡문란을 불러일으키는 원인으로 작용하였다. 대전(代錢)의 형태와 함께 환곡을 거두기 위한 임시적인 방편이지만, 원래의 곡물로 환원시키지 않음으로써, 곡물의 축소와 운영자들의 농간의 여지를 제공하였다.
참고문헌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 『속대전(續大典)』
- 『만기요람(萬機要覽)』「제도어사재거사목(諸道御史齎去事目)」 『암행일기(暗行日記)』(金相稷)
- 문용식, 『조선후기 진정과 환곡운영』, 경인문화사, 2000.
- 양진석, 「17, 18세기 환곡제도의 운영과 기능 변화」,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9.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