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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9일 (토) 23:13 기준 최신판



흉년에 부유한 자에게 사적으로 진휼에 필요한 곡식의 일부를 부담하도록 권하던 일.

개설

흉년이 들었을 때에 부유한 사람에게 권하여 굶주린 사람을 구제하게 하는 일은 어느 시기에나 있었다. 조선전기에는 세종·세조·성종·명종대에서 이런 사례가 보이며, 선조·광해군대에도 사례가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흉년이 들었을 때에 곡물을 확보하기 위한 방안으로 권분이 지속적으로 시행된 것은 조선후기의 상황이었다.

흉년이 들었을 때에 민간의 부유한 사람이 자발적으로 곡식을 출연하는 권분은 진휼곡의 확보에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지방관의 입장에서는 진휼 곡물을 마련하기 위한 방편으로 부민에게 강제적으로 징수하려는 시도가 종종 있었으며, 지방관이 마련해야 하는 자비곡(自備穀)을 권분을 통해 마련하기도 하였다.

이런 폐단으로 인해 『속대전』은 ‘곡식을 비축한다고 핑계대고 민간에서 권분하는 것을 엄금한다.’고 규정하였으나, 권분이 중지된 것은 아니었다. 때때로 권분을 금한다는 지시가 내려오고 일시적으로 금하는 경우도 있었으나, 조금 시간이 흐르면 다시 권분이 시행되었다. 권분이라는 말 대신에 ‘자발적으로 바친다’는 ‘원납(願納)’ 혹은 ‘부민원납’이란 용어를 사용하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대전통편』에서는 진휼곡을 원납하는 사람에 대한 포상 기준을 50석을 기준으로 규정하고 있다.

19세기에도 진휼사업이 시행될 때에는 민간의 곡식을 확보하기 위한 방안으로 권분이나 원납이 활용되었다.

제정 경위 및 목적

조선후기에는 각종 전란과 군영의 설치, 임시 아문의 증가, 재해의 빈발 등으로 만성적인 재정 부족 현상을 빚고 있었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새로운 환곡을 창설하기도 하였으며, 민간에서 곡물을 징수하는 방안을 강구하게 되었다. 선조대에서 효종대까지는 전후 복구사업과 외교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일정량 이상의 곡식을 국가에 납부하면 실직(實職)을 제수하였고, 현종에서 경종대까지는 흉년에 진휼곡을 마련하기 위해서 공명첩(空名帖)을 판매하였으며, 영조·정조대에도 진휼곡을 확보하기 위하여 부유한 백성들에게 자발적인 곡식 납부를 독려하였다. 이러한 곡식납부제도는 영조대 이후에 법제화되었다.

내용 및 변천

조선왕조 정부에서 곡물을 모집하는 납속책으로서는 공명첩의 발급, 권분의 시행 혹은 원납의 장려 등이 있었다. 권분이나 원납의 시행은 형식적으로 민의 자발적 참여를 유도하고 그에 대한 포상으로 직첩의 지급이나 실직의 제수 등이 이루어지고 있었으나, 공명첩은 대량으로 싼 가격에 발급하여 곡물을 모집하는 제도였다. 공명첩에 대해 왕조 정부는 국가 재정을 소비하지 않고 재정을 확보할 수 있는 방법으로 인식하였다.

공명첩이나 권분을 통하여 확보한 곡물은 진휼시에 우선적으로 사용되었다. 흉년 시에 주로 진휼사업에 사용되는 곡물은 국가 보유 곡물·자비곡·공명첩가곡·부민원납곡 등이었다. 분급을 하고 남은 곡물은 국가 보유 곡물에 다시 회록되어 원곡의 감축을 최소화하는 데 충당되었다. 즉 지방에서 마련한 자비곡과 공명첩가곡·부민원납곡이 모두 사용되었지만, 왕조 정부의 관리 곡물은 획급한 곡물 모두를 사용하는 것은 아니었다. 공명첩가곡은 무상 분급에 사용되기도 하였으며 진휼사업의 부대 비용으로도 사용되었다. 진휼사업시에는 곡물의 분급 이외에 된장·소금·미역 등을 함께 분급하였는데 그 비용은 지역에 따라 차이가 있었다. 숙종 연간에 일반화되었던 공명첩의 발매는 영조대 『속대전』에서 큰 흉년에만 발매하도록 규정하였으나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권분은 부유한 백성들을 수탈하는 데 이용되기도 하였다. 특히 수령이 자비곡을 비용절감에서 마련하지 않고 부민에게서 곡식을 거둬내 마련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대민수탈로 인해 권분을 금하였으나 기근시에 진휼 곡물을 마련하기 위하여 원납이라는 명목으로 지속될 수밖에 없었다. 공명첩의 매득이 단순히 명예를 추구하는 것이라면 원납은 좀 더 실질적인 이익을 추구하였다. 따라서 원납가는 공명첩의 발매가보다 월등히 높은 액수를 권분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영조 연간에 제정된 「부민권분논상별단」에서는 1,000석 이상이면 실직을 제수하도록 하고 있었고, 500석, 100석, 50석 이상 등으로 구분하여 시상하도록 하고 있었다.

이러한 권분이 시행되더라도 공명첩의 판매가 중지된 것은 아니었다. 또한 원납이 민의 자발적인 참여보다는 관의 강제에 의해 억지로 참여하는 경우도 종종 발생하여 폐단을 일으키자 원납을 금하는 규정이 마련되었다. 권분·원납에서의 폐단은 주로 소액을 납부하는 민에게 집중되었다. 1,000석 이상을 납부하는 사람에게는 실직을 제수하고 있었기 때문에 고액 납부자들은 관직을 위하여 자원하여 납부하기도 하였다. 원납을 금하는 명령은 종종 내려지지만 공명첩과 마찬가지로 지속적으로 금할 수는 없어 치폐가 반복되었다. 권분을 통하여 일부 사람들은 벼슬을 얻거나 직역을 바꾸기 위한 방법으로 활용하였다.

19세기 들어서도 진휼사업이 실시될 때에는 부유한 백성들에게 권분을 장려하여 진휼곡의 확보에 힘쓰고 있었다.

의의

흉년이 들었을 때에 민간 보유 곡물을 진휼곡으로 활용하기 위해 시행한 권분은 국가 보유 곡물의 손실을 보충하기 위해 시행하였다. 지방관이 권분을 활용하여 부민을 수탈하는 경우도 발생하였지만, 이를 통해 일부는 벼슬길로 나아갔고, 힘든 직역을 벗어났다.

참고문헌

  • 『속대전(續大典)』
  • 『대전통편(大典通編)』
  • 『대전회통(大典會通)』
  • 서한교, 『조선후기 납속제도의 운영과 납속인의 실태』, 경북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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